말씀 위에 굳게 서라
(시119:133)
(시119:133)
겔 37:1-14 본문의 뼈 환상은 이스라엘의 당시 형편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3차례에 걸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왕족과 귀족 관원 기술자 할 것 없이 모조리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망한 겁니다. 그 모습이 뼈 바다입니다.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었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 뼈를 허탈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건 상식적으로 볼 때 정말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산소 호흡기를 꼽고 있는 사람을 보며 이 사람이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묻던지, 말기 암으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을 가르켜서 살 수 있겠냐 묻는다면, 생명이 아직 붙어있으니깐, ‘가능합니다.’라든지 ‘씨게 기도 한번 해 봅시다.’ 하겠는데, 뼈조차 말라서 누렇게 되어 있잖아요?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물어보시면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칼빈은 ‘신앙이란 눈을 감고 귀만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했고, 무디는 ‘신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20년 첫 주일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하신 질문에 대해 가장 신앙적인 답을 우리 함께 찾아보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뼈골짜기가, 왜 생겨났을까~ 라고 할 때, 아마도 이곳이 바벨론과 유다간에 있었던 큰 전쟁터고, 여기서 유다군이 몰살당하면서 그 시체를 방치해 둔 바람에 생겨났겠죠. 물론 이건 환상으로 본 겁니다. 그 뼈무더기 속을 지나가게 하셔서 “본즉.” 아주 자세히 보니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정말 자세히도 본 겁니다. 뼈가 말라서 노랗게 된 걸 본 걸 겁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내용이 창2장에 나옵니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지나가는 암수 동물들을 보면서 아담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하라고 이 일을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무슨 생각을 하게 하시려고 이를 보게 하셨을까요?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뭔 생각하고 있냐를 3절에서 물으신 겁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그거 니 눈으로 내 생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현실을 제대로 아주 자세히 들여다 봐~ 그러니깐 뭐가 보여~ 어떤 생각이 드니? 예.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만을 보는 훈련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우리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우선으로 여기고 최고인줄 알아요. 이게 굳어지면 다른 면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선 너무 관대해. 딴 사람이 실수하면 정확히 꼬집어 내는데, 자기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지~’ excuse가 너무 잘 돼. 그러면서 자기를 늘 높게 여기고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단 말에요. 그러니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이를 두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3:17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만하면 잘 하고 있는 거야~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자기 생각에 취해 있는 거에요. 그게 착각이라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해요. 그러니 내 중심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정신 차리고 봐~ 보는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고자 하시는 지 그걸 봐~ 선지자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했죠. 이게 참 정답이더라고요. Yes, No가 아니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 대답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거 당연히 안 되는 것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뼈가 다 누렇게 되었는데... 결국 저는 부정적인 답을 생각한거죠. 그러나 주님 말씀은 ‘봐봐~ 좀 더 자세히 봐봐~’ 그래 바짝 말라 있는 뼈를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깐 뭔가 달리 보이는 거에요. 오늘 하나님 우리에게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을 하나님 눈으로 보라 하십니다 뭐가 보이십니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어떻게든 깨어 기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고요, 못 나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요, 어느 분은 새벽 오셔서 알레지성 기침을 하는데, 그때부터 저 다른 기도 안 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 기도만 했어요. 어느 분은 제가 아무리 봐도 웃을 일 없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기쁘신지... 19년에서 20년으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서 제 main 찬송이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보이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도 보이고, 기도하려고, 일어서려고, 주님 앞에 있으려고 안간 힘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봐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이제 들어야 합니다. 4절에서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심령, 우리 생활, 자녀들, 가게와 직장들이 올 해는 또 어찌 될런지 암담합니까? 뭐가 복잡합니까? 주님 앞에 다 갖고 나오세요.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방법을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십시오. 믿고 맡겨서 우리 마음 좀 편해져 보십시다. 할. 이 나무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참고로 원래 이랬습니다. 당뇨에 좋고, 고혈압, 피 맑게 해주는 일명 ‘바나나나무’에요. 근데 이게 열대수라 겨울이 되어서 집안에 들여놨더니 그 무성한 잎사귀가 다 말라 비틀어져 버려서 지금 숨만 깔딱 깔딱 쉬고 있어요. 살겠어요? 죽겠어요? 예. 살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다 마르고 비틀어졌어도 가지 끝 조그만 잎새들 보이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지금 최소한 활동만 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봄이 되면 밖에 내놓을 겁니다. 그럼 봄기운이 들어갈 것이고, 새 힘이 쏟아날 것이고, 잘 자라날 환경이 조성될 것이고, 하나씩 하나씩 새 싹을 내놓을 것이고, 이전보다 더 무성한 잎새를 자랑할 겁니다. 그러면 저는 맛나게 뜯어먹고서 제 피도 맑아질 것이고...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우리 인생에 대해 기대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저 나무의 청사진을 말씀드렸잖아요? 자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뻔한 일이고, 길이라도요, 시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내 소리 듣지 말고, 예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래야 일이 이루어지고 돌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일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이유는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생명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이 옆구리를 창으로 푹~ 쑤셔서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제 곧 다시 오십니다. 믿아. 그러니,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우리 삽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앞에 있을 다음 단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 말은 앞으로 어떻게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나타날지를 기대해봐라는 겁니다. 하나님 분명히 우리 마음 아십니다. 우리가 정말 어떻게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주일을 지키려고 얼마나 마음 졸여하고 있는지, 기도의 자리에 서려고 어떻게 힘을 다하는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그거 다 알고 계십니다. 좀 부족해서 부끄럽다고요? 그것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 ‘생기야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성령이여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신겁니다. 우리 마음도 아시고 기도 소원도 아시고, 분명 응답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듣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9% 뼈 였던 것이 다 살아나서 이제 1% 공정 생기만 들어가면 됩니다. 사람도 아닌 뼈 바다였던 것이 사람처럼 다 변화되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겨우 1% 남았어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길 우리는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게 하나님 중심 신앙과 자기중심 신앙의 분깃점입니다. 1%의 가능성, 99%는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고, 나머지 1% 정도는 하나님이 사람의 협조를 구하신다(?) 이게 신인협조론, 자력구원설이 되는 겁니다. 우끼지 않습니까? 겨우 1%만 어떻게 우리 생각대로 한 번 잘 해보겠다는데 그걸 두고 자력구원설,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니... 분명 우낄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냐 싶을 겁니다. 그래도 이건 진리입니다. 사람은 아담 이후로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우리 스스로 정화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성인들이 나와 아무리 성인처럼 해도 우리가 또 그걸 따라서 한다 해도 안 돼.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 아니고는 구원 받을 사람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야만 작은 일 하나라도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99%를 하나님 이루어주셨으면, 나머지 1%도 주님의 도움을 더 강력하게 구해야만 합니다. 그게 정석야.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아~ 하나님이시구나. 무덤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이 해 주셨구나~ 고국 땅에 돌아와서도 아~ 하나님께서 밤의 달도 낮의 해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구나~ 우리가 분명히 이 귀한 진리 알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고백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고백 듣고 싶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찌시렵니까? 이 한 해, 어떻게 사시렵니까?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 강렬한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은혜만 따라 살고, 응답 받는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축복으로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기적을 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듣게 해 주십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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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8-14
오늘 말씀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그림은 역시 ‘구유’입니다. 그러나 이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을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너무 불결한 주변 상황 때문에 갓 태어난 이 아기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 작고 연약한 아기는 놀라운 인생을 사셨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각자의 신앙의 결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Beloved, 구유에 누인 아기로만 보겠습니까? 당신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점점 커져가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듯이, 구유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성장되는 믿음 가지시길... 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성탄이 주는 참 믿음의 진실을 찾는 성탄 신앙 가지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9절 봅시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한결 같이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이 같습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죄성을 지닌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있던 천사를 만났으니 말에요. 이거는 꼭 중죄인이 경찰을 보면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찰이 뭐라 그랬나요? 그냥 제 발이 저리는 거에요. 괜히 잘못한 것 같고, 피해야 할 것 같고... 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하나님을 직접 본다면 죄 때문에 말로 표현 못할 공포가 다가올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못 쳐다봤습니다. 그런 모세도요, 백성들 앞에서 위엄 있는 척하고, 잘난 척 했어도, 히12:21 보세요.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벌벌 떨다 왔어요. 우리 같으면요, 아마도 봉헌이고 기도고 상관없이 기절부터 했을 것입니다. 심장마비라도... 그걸 어떻게 아냐?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목자들도, 사가랴도, 마리아도 우선적으로 천사를 만났을 때 무서워했고,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난리를 쳤죠. 에스겔도 그렇고, 다니엘 같은 경우는 아예 기절했다가 며칠을 앓아 누었다 일어났어요. 단8:27a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기드온은 죽는 줄 알고 막 울었어요. 삿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이게 다 하나님 직접 만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쏘인 천사 보고 이런 겁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니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면 어찌되겠어요? 죄인인 우리는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천사 보내신 겁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 기쁜 소식이 곧 성탄의 소식입니다. 아이들 잘 받아먹게 후후 불어서 식혀서 준 거야. ❶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❷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기쁜 소식을 왜 천사들을 미리 보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는지 아시겠죠? 안 그러면 다 죽어요. 무서워서 쳐다보지 못해요. 이것도 지금만에요. 예수님 우리 앞에 오실 때까지 만에요. 어쨌든 천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로 평생을 주님 앞에 있도록 잠깐만 말을 전해주고, 표적도 보여주고 해서 우리 시선을 예수께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 뿐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니깐, 천사가 화를 내잖아요? 자기는 절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절과 경배는 오직 어린양 예수 우리 구주께만 돌리는 거라고. 천사가 딱 그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았기에 죄인된 우리 인생이 보기에 좀 두려울 뿐입니다. 아시겠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성탄의 복음입니다. 그들이 전해준 이 성탄의 복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눅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두렵지도 떨지도 않고 그저 평생 주만 섬기게 해 주시기 위해서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할. 핵심을 들어야합니다. “구주가 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합니까? 죄 때문에 그래. 그 인류를 죄와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시고,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빠짐없이 충족시키는 복을 주셔서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그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영생토록 섬기게 하기 위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직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이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겁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히브리어로 ‘메시야’. 선택된 자란 뜻이죠. 그러니깐 오신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수행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권능과 능력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교회를 섬길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았어요.할. 그리고 주이십니다. 어머어마한 호칭입니다. 성경에 20번 정도 사용되는데, 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정식 호칭(이름)으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깐 오직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권능이 주어집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깨닫도록 받아들이도록 표적도 보여주고, 기적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니, 이 말을 듣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변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마리아나 사가랴 때처럼 천사가, 평안하라~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느낄 수 있잖아요? 그 말씀을 다 깨달은 목자들이 가지는 평안함.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도 또한 주의 평안함으로 감사함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생각해보고자 하는 성탄에 대한 믿음의 진실은, 목자들에게 있습니다. 지난 주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 유대의 유력자들은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다 침묵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목자들은 당시로선 비천한 계급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런고하니, 그들은 직업상 양떼들과 같이 지내요. 짐승들과 같이 살다보니 자연히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 밥 먹기 위해서 손 씻고, 발 씻고 할 틈이 있겠어요? 그 들판에서. 그러니 자연히 유대의 정결법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거죠. 그리고 이들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쳤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은 좀 다른 부류의 목자들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희생제물용으로 드려질 양떼들은 따로 관리를 시켰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이 목자들은 양을 키우면서 아주 조심해야할 부분이 바로 양을 흠 없이 키우는 겁니다. 자연히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이래되었던 저리 되었던 그들이 키우는 양떼의 소유가 누구의 소유이든, 어떤 용도로 쓰일 거라 하는 것 하고는 상관없이 이 목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이 보던 안 보던 간에 정직하고 성심껏 깨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은 거죠. 시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정직하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일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해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자 아네요? 다윗도 형들을 대신해서 밤새도록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럼 형들은요? 선지자 사무엘 보러 갔죠. 여기서도 하나님께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다윗을 쳐다보셨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낙심했을 수 있어요. 지금 여기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왕 될 기회는 싹~ 날라갔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정직한 자의 얼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얼굴을 보셨죠.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날까요? 그리고 설령 나타난다고 해서 아무 목자들이 다 아멘으로 받아들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긴 한데, 고집불통이 있어요. 그래서 정직한 건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가난하지만,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도 있어요. 결국 천사들은 어떤 목자들에게 다 나타날 수 있습니다. 꼭~ 천사 만나야하는 목자 없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시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예수를 우리 인생에서 구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표적이 있을 거라는 그대로 달려가서 그 표적을 확인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안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도망도 안 가고, 끝까지 자리 지키면서 천사의 말을 다~ 들은 이 목자들요, 은혜 받은 목자들입니다. 마리아나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날 때는 ‘은혜 받은 자야~’ 라고 했지만, 이들에게는 ‘은혜’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준 것도 은혜고, 그 자리를 지킨 것도 은혜고, 가서 확인한 것도 은혜. 첫 성탄 맞이한 것도 은혜고, 모든 것이 다 은혜에요.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성탄의 주일을 주께 예배로 드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생의 내용들이 장애가 되어, 이리저리 가로막혀서 이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나를 위해 구주가 오셨으니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합시다. 주님, 이 은혜, 예수를 내 구주로 알아보는 은혜, 내 구주가 되신 예수를 평생을 따라가는 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 은혜에서 절대 떠나지 않게 하시고, 주의 귀한 손에 꼭 붙들려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주 예수여 오늘 새빛의 온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눅 1:26-38
언젠가 ‘어느 감독의 죽음’이란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감독목사님이 기도하다가 하나님 음성 듣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얘기 기억나시죠? 이와 비슷한 사건이 눅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일을 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물론 그 감독과 같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 일이 있은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한 겁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깐, 38절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어요. 예루살렘에 사는 유명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갈릴리 나사렛 아주 시골 산골에 사는 이 여자가, 그것도 당시 나이라고 해봤자 불과 13살 정도인 소녀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기에 이토록 믿음이 좋은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 오늘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들여다보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 나누게 되길... 먼저 천사의 소식을 듣고 “생각하매” 했다고 했습니다. 29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랍고 흥분이 되었을 건데, 사가랴처럼 그렇게 경악하는 대신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다른 말로 ‘내게 천사를 통해 이 말씀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한 겁니다. 보통 구약을 보면, “은혜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말로 접근하는 선지자나 천사들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고자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온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쓰실 건덕지가 없거든요. 지혜, 명철, 훈련, 양육 ... 26절 보면,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사마리아와 국경지대에 있는 산골입니다. 주로 도망자들이 숨을 곳을 찾아 스며드는 산골에요. 그걸 유대인들은 다 알아. 그래 당시 유행하는 격언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입니다. 빌립이 ‘나사렛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라고 하니깐 나다나엘이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생각에도 뭐 이런 산골까지 찾아와서 쓰시겠다니 마시겠다니 하냐? 또 자기가 쓰임 받을 건덕지가 없는 이유가, 자신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하고요, 꼭 있잖아요? 우리나라 종가집에 찾아와서 ‘니가 태종 무열왕 40대 후손이야, 왕손이야 왕손.’ 하는 것처럼 ‘다윗왕의 28대 후손이야, 공주야 공주. 품위를 지켜야 해~’ 아~ 그럴 때는 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게 도대체 현재 마리아의 위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망할 대로 다 망해서, 이 산골에까지 흘러와서 근근히 살아가는 살림형편에 과거에 빛나는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사명을 맡기실 만큼의 조건들을 갖춘 것이 어디에도 있질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 받은 자”라는 둥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둥의 말이 도대체가 감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에게 대해서 여러분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경험이나 교육적 수준을 볼 때, 지금껏 신앙 생활한 수준을 봐도, 하나님 위해 일 할 수 있는 후보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전혀 없다고 보십니까? 혹자는 말합니다. 마리아가 겉으로는 그래도, ❶그 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 만한 선한 덕이 있고, ❷영원한 처녀성을 지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쓰임 받기 충분하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반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런 것 없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굳이 함께 하셔서 마리아를 사용하셨다는 말. 마리아 말마 따라 34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예. 마리아의 모든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입니다. 그게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그렇기에 37절 말씀이 정답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할. 하나님 하신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분명하게 해야 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백번 천번 만번을 생각해도 준비가 안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정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제한하지 마시고, 천사가 하는 이 말씀에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할. 그리고 궁금하잖아요? 마리아도 궁금해 하죠?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누가는 마리아와 사가랴를 은근히 비교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사가랴는 제사장으로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하다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도 같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지만, 사가랴에 비해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만, 얘기를 들은 후의 서로의 반응은 그들의 급수를 바꿔버렸습니다. 사가랴가 아마도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18절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의심한 겁니다. 그래서 좀 더 확신할 수 있을만한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불신하는 속마음이 들통 났습니다. 그래서 아들 낳을 것이지만, 20절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의심의 댓가로 벌칙을 받은 겁니다. 다른 표적 보여줄 수 없고, 애 낳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벙어리다~ 뭐 그런 말이죠. 그에 비해 마리아는 당시 12~13세로서 요셉이란 남자와 정혼한 산골 처녀였습니다. 근데도 38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 말은 마리아가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❶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철저하게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❷ 또 주님이 자기 인생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고 주께 맡기기로 한 겁니다. 물론 이 순종 때문에 겪어야할 고난, 조롱 불명예스러운 일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우선 인간적으로 이게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도 이 일이 이루어져서 임신을 했다가, 발각이 되면 남편될 요셉이 이 일에 동의를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여인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져 주겠습니까? 또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미친 여자라 할 거죠. 그래서 이건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신앙의 부분이라는거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신앙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가랴처럼 좀더 확신이 들도록,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보다는 사가랴의 예를 따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의심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겠다는 둥, 아니면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 무슨 이런 협박이 다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정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죄질이 나쁜 말투요, 생각들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믿음만은 가지고서 늘 걸으며~ 우리는 마리아의 단순한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가라고 하시는 길이 고난의 길이고, 절망할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여도 그게 하나님 말씀이면, 하나님 뜻에 겸손히 복종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새빛의 성도들, 또 이 말씀을 mp3로 들을 우리 새빛의 성도들의 장점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집입니다. 할. 참으로 힘든 이 한 해를 주님만 의지하고 나아왔죠. 그게 우리 장점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릴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히 주의 큰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할 우리는 그걸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맞으시면 아멘. 이게 우리 믿음의 장점에요. 오늘 둘째 말씀은 바로 그 기다림, 기다림을 어떻게 하냐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표적을 달라, 기적을 달라~ 하면서 조바심 있는대로 다 내다가, burn-out되어 버릴 수 있어. 독수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잡아서 쇠줄(체인)로 발을 묶어서 큰 바위에 매어두었습니다. 퍼득퍼득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하는데, 발에 단단히 묶인 체인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근데 사냥꾼의 어린 아들이 보기에 불쌍했던지 슬며시 풀어주었어요. 근데 독수리가 안 날라 갑니다. 그냥 바위 위에 앉아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burn-out입니다. 정말 무서운 겁니다. 그냥 포기하는 겁니다. 어떤 기대도 안 가져요. 더 이상 부흥을 위한 기도도 안 해요. 소망도 안 가집니다. 어떤 계획도, 시도도 하질 않아요. 그냥 이대로 가다보면 알아서 되겠지~ 혹시 이런 맘 있어요? 그게 burn-out된 모습에요. 예수님 오실 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페르시야보다 더 쎈 알렉산더제국이 나타났고, 그보다 더 쎈 로마가 나타났어요. 메시야가 와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대국이 나타났으니, 그만 메시야를 포기했습니다. 기다리는데도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잊고 살았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가 그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4절 “헤롯이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절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성경적 근거까지 대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너무 좋아서 동방박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별을 찾아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하는데, 과연 그랬습니까? 헤롯만 아이들 죽인다고 설치고 다녔어요.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기다림은 burn-out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함께 해 주실 줄로 믿는 기다림,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신 것이 없음을 믿고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저는 분명히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분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요, 감사한 것이 저녁때에 아무도 없는 교회 주차장에 와서 혼자 기도하고 가시는 분이 있대요. 지난 주간에는 또 다른 분이 새벽에 매일 나와서 기도의 메이트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세요. 아니 이렇게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37절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눈물흘리면서 주님께 요청한 것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 주실 믿고 기다리면,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은혜가 있을 줄 2019년의 성탄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여자의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 갈 4:12-20
지난 주 우리는 율법은 구원의 문 앞까지만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인도로 문 앞에서만 서성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때가 차매” 즉 하나님의 때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으로 이끄셨고,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구원 받은 이들이 한 눈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심을 알고 부를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뜨겁게 해 주셨습니다. 믿 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게 얼마나 좋았으면, 자신이 과거 율법 아래 있으면서 가졌든 모든 베네핏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이 Good News를 들고 갈라디아로 온 겁니다. 오늘은 우리도 이 좋은 복음을 받고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좋은 신앙은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13-14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 전하러 오다가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밤빌리아지방의 해안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안질 또는 간질 병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한 부분을 볼 때, 이게 간질이 아았을까~ 왜냐면 당시엔 간질을 악마와 연결시켰거든요. 사람들이 정말 불쾌하게 생각했어요. 15절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한 걸 볼 때 안질 같기도 하고요. 뭐든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거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3-14절이 하는 말이,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거에요. 이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저렇게 아프면서도 저 정도 열심인 것을 보면, 저기에 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겠냐~ 정말 복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대단합니다. 사람들 생각하고는 너무 달라. 신기해. 어느 교회에 새 신자가 갔더니, 그날따라 장로님 부인되는 여집사님과 그 교회 권사님이 머리 끄댕이를 잡고 밥 먹다 말고 싸웠대요. 하필이면 그날따라. 새신자가 왔는데, 그 분 그 다음 주일 교회 나왔게요? 안 나왔게요? 안 나왔으면 말도 꺼내지도 않았겠죠? 왔어요. 왜 왔냐? 궁금해서. 장로 부인이 안 나올까, 권사님이 안 나올까~ 그게 너무너무 궁금해서 왔대요. 찬바람이 쌩쌩 불긴 해도, 둘 다 나왔더래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분 마음에 역사하시는데, 궁금증을 갖게 역사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들어간 거에요. 갈라디아 교회에도 분명히 이런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열정에다가,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고, 소위 은혜 받은 거죠. 이 둘이 딱 합치니깐 그들 마음속에 자기 눈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신앙의 열심히 생겨난 겁니다. 교회에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었고,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런 비전도 꿈도 없는데, 역사가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는 겁니다. 지난 주 중에 새벽기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놀랐기 보다는 감동이죠. 몇 개월 만에 어떤 분이 오셨어요.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근데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목사는 항상 걱정야. 보통 갑자기 오신 것은 무슨 급한 기도제목이 생겼을 때거든요.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새벽예배가 끝나자마자 물어봤죠. 아뇨. 그런 일 없어요. 모처럼 만에 새벽기도 나왔더니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쳐다보시는데... 좀 미안하기도 했고, 더 감사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기도하러 왔으니 성령충만을 받으라 어쨌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성령의 만지심 속에서 이게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우리가 이런 귀한 신앙, 좋은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열심 있는 신앙의 자리에 굳건하게 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겁니다. 진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세요. 하나님은 과거에 백번 천 번 잘못해도, 주께 나와 ‘예수님 죄송해요.’ 하면 다 잊어주셔.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회개했으니 니 죄가 다 희어졌는데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시는데, 문제는 우리에요. guilty feeling이 남아서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 괜찮다는데 물론 우리게 이 guilty feeling이 있는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겁니다. 계2:23b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행동한 게 좋지 못하니 회개기도하고도 마음이 찜찜하겠죠. 성경에도 이런 말씀 얼마나 많아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에서도 그래요. 계20:12 보세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기록된 자기 행위대로 심판 받는다고 했죠? 정말 두려운 일입니까? 안 찜찜하겠어요?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근데 자세히 보십시오.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무슨 책이라고요? 생명책 앞의 책들은 행위의 책입니다. 그기 해당되는 사람들은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받을 겁니다. 어떤 행위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랑을 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까지 불신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행위의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책이 펴집니다. 생명책입니다. 어떻게든 생명의 자리로 옮겨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눈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담긴 책이고, 은혜의 책입니다. 이건 행위에 따라 심판이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에 따라 적용되는 책입니다. 이거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착같이 우리의 과거를 다~ 들추어내실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 찾아내시는 건 우리 장점에요.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실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걸 잘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적발해 내셨습니다.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영접했다.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찾아낸 것들, 너희가 이렇게 한 것들이 다 너희에게 복이 되는 것들이다. 물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상황이, 사실은 별로 좋지 못한 때입니다. 16절 봐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으냐.” 원수가 되어 있대요. 17절b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간질 당했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갈 성도들에게서 어떤 것을 찾고 계세요? 하나님을 위한 선함,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것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들,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잘난 게 뭐가 있습니까? 맨날 불평만 쏟아내고 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나안으로 이끄셨어요. 작은 꼬투리라도 다~ 잡아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해주시면서 그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믿는 우리를 위해 그 날에 생명책이 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19-20절을 합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언성을 높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자. 해산할 때, ‘아~ 나 애기 낳아~’ 하면서 낳은 분 손들어보세요. 없어요. 악을 쓰면서 낳았지. 근데 바울이 다시 그 수고를 하려는 이유는 20절 말씀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의혹이 있다’는 말은 흔들리고 있다. 그들이 100% 다 돌아선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있는 이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하신다는 것 알죠? 바울도 하나님 마음 알아요. 그러니 18절서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나 좋은 거다. 이 좋은 신앙의 일을 다시 해보자~ 계속해보자 하면서 불물 가라지 않고 덤벼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 해 이 마음이어야 해. 이게 좋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이 주신 마음 갖고 나서 보십시다. 2019년 한 해를 보낼 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은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를 섬기는데 있어 열심을 품기 바랍니다. 기도의 열심도 내고, 찬양의 열심을 내고, 마음을 주를 향해 굳건하게 하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처음 이 땅에 초림하실 때도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은혜입니다. 세상 마지막을 다룬 요한계시록에도 ‘함께 하신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보세요.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눈물도 사망도 아픈 것도 없는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요, 좋은 신앙의 일을 열심히 사모하고 최선을 다해 주 안에 있으십시다. 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 결론으로 나누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알죠? 성경학자들은 이 기도는 원래 야베스의 어머니의 기도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기구한 운명 앞에서 의지할 이는 하나님 밖에 없어서,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그걸 아들이 듣고 같은 기도를 하고...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최고의 장점인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축복을 주신 거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뚫어지라 쳐다보고 계십니다. 축복해주실 장점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좋은 신앙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우리 이웃들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우리 불쌍히 여기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장점 정말 없습니다. 내세울 게 마땅히 없고, 보여드릴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의 장점의 꼬투리를 잡으시는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이 감사와 기쁨과 형통과 평안으로 주 안에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할. |
묵상의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