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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위에 굳게 서라 (시119:133)

주일 설교

20-0126   근데요 하나님  욘1:1-3

태극기와 촛불, 작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을 보면서 느낀 점이, 사람들이 너무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깐 자신들만의 line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 line을 넘는 사람이든 뭐가 되든 무조건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거죠. 
사실 이 line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게 보통 삶이었습니까? 너무 많은 사건, 사고들을 경험했죠. 많은 실수와 오류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뒷통수를 얻어맞았고, 배신을 당했는지 셀 수 없어요. 이젠 사람들 얼굴만 봐도,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감이 딱 서. 표정 보면 뭔 말 하려고 하는지도 알아.
물론 우리들 자신도 필요할 때 많은 거짓말 해왔고, 남의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해 경계심도 생겼고, 불신도 생겼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미움과 분노도 생겼습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우리 마음에도 그런 가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지요.
사실 성도로서의 신앙 face를 갖고 있지만, 이런 상처난 가시들이 내면에 숨어서 line 만들어
어찌 보면 이런 상처와 가시 위에 우리 신앙이 세워져 있지나 않나 싶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큰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듭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이런 것들이 안 드러나다가 어느 순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나 상황을 만났을 때 ‘툭~’하고 튀어나오죠.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좌로나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만 보는 겁니다. 근데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두 개의 신앙이 있을 수 있다 이거죠.
하나님 말씀대로 가는 신앙, 좌든 우든 내 line을 지키려는 신앙.
오늘 우리는 주인공인 요나에게서 좌로나 우로 치우칠 부분이 심각하게 있는 걸 발견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욘1:2에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그리고 7~80년 후면 그들에게 망합니다.
그런 나라가 회개하고 돌이킨다? 아니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정말 위험한 일이죠. 그들이 돌이키면 이스라엘을 살려두겠습니까? 이건 말 안해도 너무나 뻔한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도무지 따를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줄이면 순종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말씀이 우리 속에 형성된 ‘line’을 뚫고 들어오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방향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겁니다.
보세요. 요나가 단호하게 거절하잖아요? 하나님 말씀이지만, 따르면 민족이 죽잖아요? 그래서 다시스로 갔습니다. ‘다시스’란 ‘세상 끝’. 세상 끝으로 가서 숨어버리면 하나님 어쩌실 거야?
이런 요나를 보면서요, 사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편견과 자기 고집을 가지고 신앙생활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들어드릴 수 없는 line을 만들어놓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의 도전에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셨단 말입니다.
먼저 요나가 탄 배 위에 엄청난 폭풍우를 내려서 가는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그걸 요나가 알았을까요? 예. 당연히 알았죠. 요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에요. 선지자입니다. 왜 그걸 몰랐겠습니까? 알기에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잔겁니다. 그러고 볼 때, 요나는 참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보다 더한 것이라도 보내실 것이고, 이 사명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도 알아요. 
그래서 잠을 잔겁니다. 문제는 하나님 믿는 신앙이 자기 생각을 이겨내지 못한 겁니다.
보세요. 일이 그 정도까지 되었으면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맞는 건데 오히려 그 반대잖아요? 요1:12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이게 신앙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죽어도 하나님 명령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나를 바다에 던지라.’ 이게 무슨 신앙적에요~
의외로 예수를 믿지만, 그 말씀대로는 따를 수 없다는 맘 갖고 행동하시는 분들이 참 많아요.  
그래도 하나님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결국 삼일 만에 요나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주님만 따르겠다고 고백을 한 것 같아 보이죠? 그 다음 행동을 보세요. 전혀 아닙니다. 고백하고 행동이 달라요. 욘3:3b-4을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며칠 동안 전했다고요? 하루 동안만. 그것도 ‘회개하라.’ 그런 말 안했어. ‘니느웨가 무너진다~’ 대충 말하고는 재빨리 성을 빠져 나온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회개하면 안 되잖아요? 그정도까지 했으면 하나님께서도 좀 알아주셔야 하는데, 짐승들까지도 금식하고 회개하게 만드셔. 그러니 요나가 불같이 화를 내는 거죠. 
아니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애초부터 하나님 생각이 틀린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제가 몇 번이나 죽겠다고 했습니까? 근데도 기어이...

요나, 아무리 폭풍우를 몰아치게 해도,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굶겼어도, 그렇게 기도를 시켰어도, 박넝쿨을 통해 충분히 알아듣게 가르쳐줘도. 그 마음의 line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요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선을 딱 그어놓고 그 밑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닿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정말 우리 손해에요, 신앙이 성장을 못합니다. 중간에 막혀 버려요.
뭐하나 끝까지 못 해본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새를 해도 하다 말고, 통독성경을 해도 중간에 관두고, 신앙의 행동도 끝까지 못하고 항상 뭔가에 부딪혀서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왜 이럴까요? 어느 분이요, 어머니가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새벽기도 나와 열심히 기도했지만, 어머니는 살지 못했습니다. 새벽기도는 절대 안 합니다. 기도는 부탁하는데 신뢰하질 않아요. 마음의 line을 그어버렸습니다. 그뿐입니까? 정직하게 쉐어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나눈 말이 돌아다니면서 은근히 공박을 당해요. 그 후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놓지 못해요. 
어떤 이는 학교 다닐 때 좀 놀았답니다. 친구 소개로 교회를 나갔더니, 전도사님에게 다른 아이 부모가 큰소리로 ‘저런 애를 우리 교회에 받아주면 어떻합니까? 우리는 교회 나갑니다.’ 하더래요. 그 후로 누가 교회 나간다고 하면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굴 권면을 못해.
이렇듯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하나님마저도 보이콧트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거 압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계속 기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수십 수백번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 은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그럼 남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나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저 은혜 받을 가치가 없는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만 보이게 될 겁니다.
그 하나님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잘못 갖고 있는 이 line을 하나씩 지우고 하나님만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나를 향한 잣대는 크고 정확하게 하고, 남을 향한 잣대는 아주 낮게 하는 훈련야.
마음에 있는 미움과 질투, 두려움, 이기적인 경계선을 말씀으로 메워나가는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 걸고 순교의 자리에 서는 거창한 것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을 몸으로 행하는 것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미움과 다툼을 용서로 바꾸는 방법, 욕심을 희생과 헌신으로 바꾸어 가는 법, 분노와 저주를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 그게 신앙생활, 예수 따르는 겁니다.

자, 이제 욘4:12을 읽어봅시다. 예. 4:12절은 없습니다. 요나서는 결론이 없는 책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넌 그 다음에 어떻게 할거니?’란 질문으로 끝내시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해라. 계속 마음에 line 갖고 니 맘대로 살거냐? 아니면 다 지워버리면서 살거냐~
예수님 베드로에게 비슷한 질문 하셨죠. “니가 나를 사랑하냐?” 주께서 아시잖습니까? 당연히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도요, 예수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면서 따라 갑시다. 베드로처럼. 


20-0119  은혜 받은 사람들  사49:1-5

몇 번 말씀 드렸듯이 성경은 1500여년에 걸쳐 쓰여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쓰여진 요한계시록이 A.D.95-96년 사이에요.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부터 시작해서 2000년 전까지  쓰여 졌기에 지금하고 시대적인 격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두 가지 지평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죠. 하나는 성경이 쓰여 지던 그 시대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죠? 그때하고 지금하고 인간의 삶의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기다가 말씀 안에도 시대의 격차가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종’이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이 여호와의 종이 누구냐~ 할 때, 이 글을 쓴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약 9백년 후인 A.D. 1년에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9백년의 격차가 있지요?
그러니 여호와의 종을 이사야서의 이사야 선지자라고 할 때 주시는 말씀의 의미와 9백년 후에 오실 메시야라고 할 때의 말씀의 의미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아주 당연하겠지요?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사야를 부르시듯 또한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 말씀을 통해서 들어 보자 이겁니다.

먼저 우리도 여호와의 종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먼저, 종이 가져야 하는 절대적인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❶ 절대 순종 ❷ 절대 신뢰 ❸ 절대 의존입니다. 예를 드리자면, 우리는 공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합니다. 이거 들이켜도 잘못되지 않는다. 그걸 절대적으로 믿죠? 공기 못 믿어요? 그럼 숨 멈춰 봐요. 어찌되나? 그냥 죽어. 공기가 꼭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종도 주인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종, 신뢰, 의존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에요. 주의 종으로서 이 공기 주신 하나님께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를 갖고 순종하고 의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갑으로서 을을 대하는 것처럼, 그냥 하나님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하시냐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화가들이 그림 그릴 때 주변 배경이래도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그린다고 하죠. 
이것부터 아십시오. 우리 정말 기분에 따라 있고 없고, 되고 안되고 절대 그런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참새 한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에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영원히 짝~ 달라붙어 있을 사람들에요. 주님 입장에선 영생을 허락하신 사람들에요. 영원히 주님 메이트에요. 우리가 그렇게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옆에 아내나 남편 보세요. 한번 지긋한 눈으로 보세요. 손도 한번 잡아보고...
그냥 한 번 보고 맘에 들어서 하루밤 사이에 결혼했어요? 아니죠? 신중에 신중을 기했죠?
하나님께서는 더한 신중을 기하셨어요. 영원히 데리고 다니셔야 하니깐. 1절b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엡1:4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했습니다. 어머니 복중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으니 이건 정말 엄청난 겁니다. 옆에 분 보시고,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기다가 2절a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회사에서 사람들을 구할 때에는 일할 파트에 따라서 구하지 아무렇게 안 구해. 어카운팅이냐 QC 파트냐 상품 운반할 트럭 기사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당연히 우리의 달란트에 따라서 부르십니다. 적당히 부르신 것 아니에요. 하나님 다윗을 처음부터 다음 왕으로서 부르시고 기름을 부우셨습니다. 철저하게 왕으로서 꼭 필요한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결정을 내릴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사울이 왜 끝까지 왕이 못되었어요? 그 훈련에서 낙제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을 다 죽이라고 했으니 진멸하면 되는데, 그럼 자기도 살고, 이스라엘도 사는데 눈앞에 보이는 소떼를 보고 흔들린 겁니다. 
물론 다윗도 실수 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하루에 7만명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왕으로서의 책임 큰 줄 알고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지 모릅니다. 왕으로서 특화된 훈련을 시키신 겁니다. 본문에서는 그걸 ‘날카로운 칼이 되도록 갈으셨다.’고 한 겁니다.
 어떤 때는 준비될 때까지 숨기셨습니다. 튀어나온 돌이 먼저 정에 맞는다 했죠. 2절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하나님의 보호 중에 숨기심이고,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원하시는 때에 적절히 쓰임 받을 때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수아를 보세요,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이끌었으니 모세의 뒤를 이을 때까지 40년을 기다린 겁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십니까? 모세 뒤에 숨어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담대함을 배운 겁니다. 배운 것이 있으니 역사의 전면에 나섰을 때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강력하게 앞으로 나간 겁니다. 40년 동안 숨기시고, 붙드시고, 힘을 더해 주시고...
그런 과정을 통해 칼 같이 쳐서 쪼개는 능력, 화살같이 두터운 갑옷이라도 한 방에 꿰뚫어버릴 능력을 길러주셨습니다. 이제 외쳐라~ 태양에 중천에 머무르라~ 나와 내 가족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으니 너희는 이제 결정하라~ 이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여호수아만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껏 이 훈련을 알게 모르게 다~ 받아 왔습니다. 
그럼 이 능력 받는 종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리야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가 엘리야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합왕에게 3년 동안 비 오지 않는다고 전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딱 전하고 나니깐, 하나님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릿시냇가로 보내셨다가 그기서 물이 떨어지니깐 사르밧과부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설마 자기 고향에 숨어 지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리고는 드디어 갈멜산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하늘로서 불이 내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무릎 사이에다 고개를 넣고 기도하니깐, 가뭄을 한 방에 해결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엘리야로 기도하는 훈련을 시키셨으면 무릎사이에 고개를 넣고 기도하겠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순간에요.
근데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3절과 4절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있죠? 느끼셨습니까?
이세벨의 한 마디가 엘리야를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셨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자기 살 곳을 찾아서 숨어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우리에게 가장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베드로처럼요, 예수님 안 쳐다보고 파도치는 바다를 쳐다볼 때입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날카로운 칼로 우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밀어지고 있다고 보일 때가 가장 큰 신앙의 위기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주님을 쳐다보지 않으니깐. 그냥 피하고, 안전하다 싶은 곳만 찾아서 들어가서, 웅크리게 되고...
복지부동이라 하죠. ‘배를 땅에 딱 깔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예전에 공무원을 풍자해서 쓰던 유행어였죠. 
너무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겁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다 안 되더라. 
그러니 기도를 해도 건성으로 해요. 열정적으로 뜨겁게 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죠.
매사에 초점이 없어요. 흥미로울 것도 없어요. 열심을 내서 이리뛰고 저리뛰어도 안될 판인데.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나님이 지금 내가 이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잘 알고 있으시겠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이러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나무가 어떻게 된 지 궁금하시죠? 한 일주일 날이 좋길래 바깥에 내다놨더니 이래 됐어. 저는 여기서 이런 것을 꿈꾸고 기대합니다. 주님도 꿈꾸길 바래. 그러니 우리가
우리가 좀 웁시다. 소경 바디매오, 열명의 문둥병환자들 공통점이 뭡니까? 예수께 울었습니다.
우리가 좀 나섭시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 열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 주님이시면 하신다~
우리가 좀 기대를 가져 봅시다. 백부장, 헤롯왕의 신하. 당장 눈 앞에서 내 종이, 아들이 살아나진 못했어도, 예수님께서 ‘나았다’고 하셨으니 그 말을 믿고, 기대를 가지고 집으로 갔듯이 우리가 좀 기대를 갖고 집으로, 가 봅시다. 그럼 도착하기도 전에 응답 주실 줄 믿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충분히 해볼 건덕지가 있는 것이, 지금까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크고 작게,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놀랄 만한 일들을 보여주셨잖아요?
무엇보다 주님 말씀대로 임마누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주님 우리와 함께 해 주셨어요. 
선지자가 외치잖아요? 5절 말씀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할. 주님 우리 여전히 능력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숨기시고 딱 알맞도록 훈련시켜주시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더 울고, 기대해봅시다.
렘33:3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니 믿어보십시다. 우린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일을 우리에게 앞으로 이루어주실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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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 예배하는 사람들 요4:13-24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는 몇 가지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끝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 하나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돼.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이게 종잡을 수가 없어요.
셋째는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거죠
문제의 원인도 모르니, 대책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이 없어. 딜레마죠.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그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 ‘이 산’은 그리심산입니다. 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하였냐면,
B.C 922년에, 르호보암왕 때에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남쪽의 유다, 북쪽의 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에게 딱 한 가지가 문제가 있어요.
예루살렘성전이 북이스라엘에 없는 겁니다. 근데 북이스라엘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절기만 되면 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성으로 가는데 그게 걱정에요. 게다가 예배드리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주정헌금 등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이건 북이스라엘의 돈이 남유다로 흘러가는 것이고, 게다가 백성들의 마음까지 남유다로 쏠려버리면 어떻하냐그것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차단하고, 남쪽 국경 근처의 벧엘과 북쪽 끝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금송아지가 뭡니까? 광야에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낸 하나님이다.’ 하면서 만든 우상 아닙니까? 그거 만들어놓고, 이제는 예루살렘까지 갈 것 없다. 제사장도 레위지파 꼭 필요하지 않다. 누구든 원하면 제사장 해라. 기회를 줄게.
한 마디로 예배라는 정말 소중하고 고귀한 것을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고, 이상한 사이비종교 하나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걸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라 한 겁니다.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 결혼하는 혼합정책을 사용하는 바람에, 혈통, 종교, 문화적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순수성이 훼손되어 버리고 사마리아사람이 되어서도, 그 잘못된 제사는 그대로 존속됩니다.
페르시아 때에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따로 지었습니다. 그러다 B.C. 128년에 하스몬왕가의 히르카누스가 파괴해 버렸는데도, 그 잔해에서 사마리아인들이 계속 제사한 겁니다. 근데 그 제사가 어떤 제사라고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금송아지에게 우상숭배한 겁니다.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장애는 얼마나 많은지... 그거 왜 나한테만 자꾸 방해가 올까~ 그래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예배 못 드리도록 예배하려는 자를 삼키려고 불같이 덤벼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거 알고 목숨 걸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 최선을 다한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자를 기뻐하십니다. 할.
교회를 못 나오시는 분들 심방을 가보면 두 가지 반응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교회를 다녔다는 모양은 있으되 예수 능력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예배를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심령을 갖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감격..
여러분, 우리 가운데 무엇보다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살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배에 눈을 떠야 합니다.
죽은 예배를 드리면서 뭐가 좀 잘 되기 원한다(?) 기대하는 거야 뭐 공짜 아닙니까?
기도 한 줄 안하면서 응답은 왕창 받으려고 하고... 일은 안 하면서 결과는 엄청 기대하고...
반대로 참 예배에 실패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준비를 엄청나게 하고 예배를 드리려 왔는데, 모처럼 만에 교회에 왔는데, 졸다가 끝났어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주 허탈한 거에요. 이런 일 발생하지 않도록 정말 깨어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의 부재는 도덕성을, 신실성을, 정직성을 망가뜨립니다. 이 여인의 문제 원인도...
이 여인이 왜 대낮에 우물가로 왔을까요? 보통은 해질녘에 날이 선선해 졌을 때,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오는데, 유독 이 여인은 정오에 나왔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가끔 그런 모습 볼 수 있죠? 예수 잘 믿는데, 사람들한테 욕먹고 있어. 문제가 있는 거에요.
사실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고 동거남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여인이 남의 남편을 빼앗서 결혼했고, 지금 있는 자도 남의 남편이었던 자다.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다섯명의 남편과 사별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걸 근거로 당시 사회가 지금처럼 밥 먹듯이 이혼하는 시대도 아니고,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였기에 남녀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시기였기에 사별했을 거라 합니다. 그러니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이 여인 마음이 어땠을까요? 지극 정성이었을거고, 안죽이려 애썼을 겁니다. 물론 이 남자와도 불륜입니다. 그래도 외로우니깐 누가 뭐라든 일을 저지른 겁니다. 그래놓고서는 주변 사람의 눈총이 너무 따갑고, 싫으니깐, 아무도 없을 때 온 겁니다. 불쌍하긴 하죠. 그래도 우리가 봐야하는 건, 그 이여인의 불쌍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삶에 하나님 경외가 없어지니깐, 도덕성이 망가진 것 보세요.
그러니 그 다음에 오는 문제는 말씀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입장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는데, 앞부분만 들리고 뒷부분은 안 들렸어요. 듣고 싶은 것만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겁니다.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히 여기시고 온전하다 하시는 것을 분별하기에 힘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 중심대로 하려고 하는 때가 있죠. 그럴 경우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 말씀이 전체로 들리지 않고, 나에게 맞는 말씀만 들으려 하죠.
그러니 믿어도 자기 방식대로 믿어요. 사실 좀 위험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응답 받는다고, 성경을 통독으로 정독으로 읽지 않고, 또뽑기 식으로 읽어요. ‘주실 줄 믿습니다.’ 해놓고 가운데를 딱 뽑으니, 사울이 칼에 엎드려 죽었더라. 오 마이 굿니스, 하나님 이건 아니죠. 그래서 좀 뒤로 딱 폈더니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유다가 자살해서 죽으매...’ 이건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다른 좋은 말씀 주세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이러면 우리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게 오늘 이 여인의 아픔이고, 눈물이고 우리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너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예배가 없어. 예배가 없으니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만남이 없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기쁨, 진짜 평안 그게 뭔지를 몰라. 그러니 뺏고 뺏기고, 숨어다니고, 그래 사는 거야. 그러나 나는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주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한 해 동안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까? 성령님께 무엇을 도와달라 해야할까요?
이 한 해 동안 사랑하시는 여러분, 무엇보다 예배를 살립시다. 이 살아있는 예배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기쁨, 평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은혜를 우리가 받읍시다.
영의 눈이 번쩍 뜨게 되십시다. 주님의 뜻을 귀하게 분별한 신앙생활로 이어지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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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37:1-14

본문의 뼈 환상은 이스라엘의 당시 형편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3차례에 걸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왕족과 귀족 관원 기술자 할 것 없이 모조리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망한 겁니다. 그 모습이 뼈 바다입니다.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었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 뼈를 허탈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건 상식적으로 볼 때 정말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산소 호흡기를 꼽고 있는 사람을 보며 이 사람이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묻던지, 말기 암으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을 가르켜서 살 수 있겠냐 묻는다면, 생명이 아직 붙어있으니깐, ‘가능합니다.’라든지 ‘씨게 기도 한번 해 봅시다.’ 하겠는데, 뼈조차 말라서 누렇게 되어 있잖아요?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물어보시면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칼빈은 ‘신앙이란 눈을 감고 귀만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했고, 무디는 ‘신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20년 첫 주일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하신 질문에 대해 가장 신앙적인 답을 우리 함께 찾아보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뼈골짜기가, 왜 생겨났을까~ 라고 할 때, 아마도 이곳이 바벨론과 유다간에 있었던 큰 전쟁터고, 여기서 유다군이 몰살당하면서 그 시체를 방치해 둔 바람에 생겨났겠죠. 물론 이건 환상으로 본 겁니다. 그 뼈무더기 속을 지나가게 하셔서 “본즉.” 아주 자세히 보니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정말 자세히도 본 겁니다. 뼈가 말라서 노랗게 된 걸 본 걸 겁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내용이 창2장에 나옵니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지나가는 암수 동물들을 보면서 아담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하라고 이 일을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무슨 생각을 하게 하시려고 이를 보게 하셨을까요?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뭔 생각하고 있냐를 3절에서 물으신 겁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그거 니 눈으로 내 생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현실을 제대로 아주 자세히 들여다 봐~ 그러니깐 뭐가 보여~ 어떤 생각이 드니? 
예.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만을 보는 훈련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우리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우선으로 여기고 최고인줄 알아요. 이게 굳어지면 다른 면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선 너무 관대해. 딴 사람이 실수하면 정확히 꼬집어 내는데, 자기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지~’ excuse가 너무 잘 돼. 그러면서 자기를 늘 높게 여기고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단 말에요. 그러니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이를 두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3:17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만하면 잘 하고 있는 거야~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자기 생각에 취해 있는 거에요. 그게 착각이라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해요. 
그러니 내 중심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정신 차리고 봐~
보는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고자 하시는 지 그걸 봐~
선지자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했죠. 이게 참 정답이더라고요. Yes, No가 아니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 대답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거 당연히 안 되는 것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뼈가 다 누렇게 되었는데...
결국 저는 부정적인 답을 생각한거죠. 그러나 주님 말씀은 ‘봐봐~ 좀 더 자세히 봐봐~’ 그래 바짝 말라 있는 뼈를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깐 뭔가 달리 보이는 거에요.
오늘 하나님 우리에게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을 하나님 눈으로 보라 하십니다
뭐가 보이십니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어떻게든 깨어 기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고요, 못 나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요, 어느 분은 새벽 오셔서 알레지성 기침을 하는데, 그때부터 저 다른 기도 안 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 기도만 했어요. 어느 분은 제가 아무리 봐도 웃을 일 없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기쁘신지... 19년에서 20년으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서 제 main 찬송이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보이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도 보이고, 기도하려고, 일어서려고, 주님 앞에 있으려고 안간 힘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봐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이제 들어야 합니다.
4절에서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심령, 우리 생활, 자녀들, 가게와 직장들이 올 해는 또 어찌  될런지 암담합니까? 뭐가 복잡합니까? 주님 앞에 다 갖고 나오세요.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방법을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십시오. 믿고 맡겨서 우리 마음 좀 편해져 보십시다. 할.
이 나무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참고로 원래 이랬습니다. 당뇨에 좋고, 고혈압, 피 맑게 해주는 일명 ‘바나나나무’에요. 근데 이게 열대수라 겨울이 되어서 집안에 들여놨더니 그 무성한 잎사귀가 다 말라 비틀어져 버려서 지금 숨만 깔딱 깔딱 쉬고 있어요. 살겠어요? 죽겠어요?
예. 살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다 마르고 비틀어졌어도 가지 끝 조그만 잎새들 보이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지금 최소한 활동만 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봄이 되면 밖에 내놓을 겁니다. 그럼 봄기운이 들어갈 것이고, 새 힘이 쏟아날 것이고, 잘 자라날 환경이 조성될 것이고, 하나씩 하나씩 새 싹을 내놓을 것이고, 이전보다 더 무성한 잎새를 자랑할 겁니다. 그러면 저는 맛나게 뜯어먹고서 제 피도 맑아질 것이고...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우리 인생에 대해 기대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저 나무의 청사진을 말씀드렸잖아요? 자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뻔한 일이고, 길이라도요, 시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내 소리 듣지 말고, 예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래야 일이 이루어지고 돌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일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이유는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생명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이 옆구리를 창으로 푹~ 쑤셔서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제 곧 다시 오십니다. 믿아. 
그러니,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우리 삽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앞에 있을 다음 단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 말은 앞으로 어떻게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나타날지를 기대해봐라는 겁니다. 하나님 분명히 우리 마음 아십니다. 우리가 정말 어떻게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주일을 지키려고 얼마나 마음 졸여하고 있는지, 기도의 자리에 서려고 어떻게 힘을 다하는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그거 다 알고 계십니다. 좀 부족해서 부끄럽다고요? 그것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 ‘생기야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성령이여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신겁니다.
우리 마음도 아시고 기도 소원도 아시고, 분명 응답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듣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9% 뼈 였던 것이 다 살아나서 이제 1% 공정 생기만 들어가면 됩니다. 사람도 아닌 뼈 바다였던 것이 사람처럼 다 변화되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겨우 1% 남았어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길 우리는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게 하나님 중심 신앙과 자기중심 신앙의 분깃점입니다. 
1%의 가능성, 99%는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고, 나머지 1% 정도는 하나님이 사람의 협조를 구하신다(?) 이게 신인협조론, 자력구원설이 되는 겁니다. 우끼지 않습니까? 겨우 1%만 어떻게 우리 생각대로 한 번 잘 해보겠다는데 그걸 두고 자력구원설,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니... 분명 우낄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냐 싶을 겁니다.
그래도 이건 진리입니다. 사람은 아담 이후로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우리 스스로 정화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성인들이 나와 아무리 성인처럼 해도 우리가 또 그걸 따라서 한다 해도 안 돼.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 아니고는 구원 받을 사람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야만 작은 일 하나라도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99%를 하나님 이루어주셨으면, 나머지 1%도 주님의 도움을 더 강력하게 구해야만 합니다. 그게 정석야.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아~ 하나님이시구나. 무덤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이 해 주셨구나~ 고국 땅에 돌아와서도 아~ 하나님께서 밤의 달도 낮의 해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구나~ 
우리가 분명히 이 귀한 진리 알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고백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고백 듣고 싶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찌시렵니까? 이 한 해, 어떻게 사시렵니까?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 강렬한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은혜만 따라 살고, 응답 받는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축복으로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기적을 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듣게 해 주십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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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9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사66:10-14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창1:1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셨는데, 계1:8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자라 하시더라.” 그리고 21:6에서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그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처음과 마지막을 만드시고 그 시대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믿 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할
특별히 이 말씀은 10절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하기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도와 눈물을 쏟아 붓기에 슬퍼하는 자들, 곧 팔복에서 예수님 말씀하시듯이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들 이 심정으로 주 앞에 서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2019년 마지막 말씀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입니다.
사66장은 구약의 계시록 21, 22장 말씀입니다. 새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서 내려오는데, 이 하늘나라에서 왕노릇할 사람이 누굽니까? 구원함을 입은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자리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에게 세마포 옷이 주어졌습니까? 주님 사랑했습니다. 그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런 성도들을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동참했다고 표현합니다. 사실 불려질 자격도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뭐하나 제대로 한 게 있어야죠. 근데 같이 왕노릇하자면서 주께서 부르셨어요. 은혜죠. 그렇게 세마포 흰 옷을 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와 어린양과 일곱 영되신 성령님 앞에서 4천사와 24장로와 천군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영원히 부르게 되니, 얼마나 좋을까요?
저와 여러분들이 다 이 자리에 서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은혜로 말입니다.
이 영광의 순간을 깊이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부활의 신앙, 영생의 신앙 가지기 바랍니다. 할.
그리고 오늘 이 은혜주시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할.
 
먼저 너무 풍성하고 만족할 위로를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다.
10절에서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실제 B.C.586년 예루살렘성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은 바벨론과 파사의 총리가 되었는데도, 포로출신이라고 해서 얼마나 견제와 감시를 받았습니까? 결국 사자굴에 내동댕이쳐지기까지 했었죠. 에스더는 왕비가 되어서도 자신의 출신 민족을 밝히 드러내지 못하고 온갖 눈치 다 보면서 숨죽이며 살았던 것, 왕의 신하 단 한 사람 하만이 수를 써서 전체 민족을 다 잡아 죽이려 해도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IS는 약한 민족이었습니다.
모든 도움과 보호가 거두어져 버렸으니, 슬픔 밖에 없는 민족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아니 여전히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어떻게 애를 썼는지를 들여다봐야 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끌려들어가게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쪽 창문을 열어놓고 보란 듯이 기도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도하다가 문득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80년, 그 80년 만에 돌아가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 또 붙잡고 기도하는 기도의 세월을 왜 보냈는지.. 우리는 바로 그것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깐...
세상은 변해가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 주께서 생명수 샘물로 나아오도록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꼭 붙잡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거 잊지 마세요. 은혜의 보좌로 이끌어주십니다. 생명수 샘물로 나아오도록 함께 해 주십니다. 할.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뭡니까? 하나님을 본받는 겁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눈을 번쩍 뜨게 되고, 깊은 감동을 받고, 우리 가슴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주를 본받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가슴이 뜨거워져서 주를 바라보니깐, 지금껏 그거 없으면 큰일 날 것 같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전에는 탐욕도 있었고, 그것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그게 악행임을 알면서도 저지르기도 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의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아~ 더 이상 이런 어두움에서 지내서는 안 되겠다. 빛 되신 주님을 따라야 하겠다~ 는 불같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물론 때론 그게 마음뿐이고 변화되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그래도 주님 바라보니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게 너무 좋아. 편해.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이 신앙에 여러분들의 가슴이 더 뜨거워지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참~ 아쉬움이 많습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난 예루살렘의 거리의 쓸쓸함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만, 이 말씀을 붙드는 순간, 그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1절 그 일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봅시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아이들 배고파서 울면 엄마가 설거지하다 ‘조금만 기다리지~’ 그러면서 우유를 타서 아이를 안고 우유병을 입에 물려주면서 눈을 맞추고는, ‘우유~ 그렇게 슬펐져? 배 고팠쪄?’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아이들이 어떻게 해요? 시원하고 배불러 가지고, ‘으, 응, 응’ ‘그래 그랬쪄?’ 아이가 뭘 알아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그래 힘들었다고? 알았어 내 새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가 바로 너야~ 네가 내 품에서 풍성한 만족을 받아라~
여러분, 우리의 구주 되신 주께서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을 안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 주시려고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풍성하게 아주 만족할 만큼 믿고 느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강같이 넘치는 평강을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다.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 우리가 정말 먼저 구해야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흔히들 신앙생활을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 하니깐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이 나네요. 그 영화를 보면,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적으로부터 나를 먼저 구해야할 것인가~ 많은 군인들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하나하나씩 죽어가는 영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입니다.
우리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나를 먼저 구할 것인가, 주님을 먼저 구할 것인가~
이거 두고 고민하는 것이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세상은 그러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뭐 기도한다고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하고 보자.’ 이럴까 저럴까 신앙생활이란 것이 흔들림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겁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그게 잘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12절에서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하셨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평안을 강같이 펼쳐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자~ 기대해라~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서 ‘강’은 우리나라나 미국의 강하고는 좀 다릅니다. 우리처럼 언제든 가서 마시고 싶다고 해서, 수영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많은 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사막기후라 wadi라고 평소에는 물이 흐리지 않다가 큰 비가 오면 갑자기 불어나서 급하게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비 그치면 곧 말라버리는 그런 강입니다.
비가 와야지만 생기는 강.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비를 주셔야만 흐르는 강입니다.
예.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급한 것부터 해결하는 것도 맞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거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셔야 강도 생기는 것이고, 넘치는 시내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더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이 세상 만족하며 살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만 기뻐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주 만 구하면?
그러면 주께서 우리의 길을 책임져 주십니다.
시142: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큰 일 났습니다. 뻔히 알 수 있잖아요? 그때문에 우리 마음이 상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 몰라 할 때도 주께서 내 길을 아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욥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는 이도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만 붙드십시오.
주님만 깊이 생각하십시오.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상에는 두 가지 만족이 있습니다. 상대적 만족입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만족이 없으니깐 두 번 세 번 하려고 합니다. 돈을 벌어도 만족함이 없으니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무너지고 마는 만족입니다. 절대만족이 있습니다. 더 이상 좋은 것이 없다는 만족입니다. 예수 보다 더 좋은 것 없고, 천국보다 더 좋은 곳은 없고, 그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는 만족을 주님이 내게 주셨다. 최고를 주셨다. 이 믿음 이 신앙으로 여러분의 가슴에 채워 넣으십시오.
누구도 빼앗아가지 않는 평안, 세상사람 다 날 버려도 오직 한 분 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은 ‘이리로 와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에만 여러분 눈 뜨십시오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주님 이 말씀, 이 은혜 우리에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송축해 내 영혼’이란 찬양이 있습니다. 찰스 웨슬레가 80세 죽기 전에 지은 가사입니다.
전 3절이 너무 좋아. 그가 주님만 신뢰하고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았는데, 주님이 그거 아시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없이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찬양으로 감사하는 겁니다. 예수님, 우리로 이렇게 살도록 이끌어주실 줄로 믿고, 이끌어주심도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즐~
곧 그 날에 나의 힘 다하고 나의 삶에 여정 마칠 때 끝없는 찬양 드리리라 수많은 세월 지나 영원히 송축해 내 영혼 내 영혼아 거룩하신 이름 이전에 없었던 노래로 나 주님을 경배해
우리 기뻐하십시다. 즐거워하십시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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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2  2019년의 성탄 신앙  눅2:8-14

오늘 말씀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그림은 역시 ‘구유’입니다. 그러나 이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을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너무 불결한 주변 상황 때문에 갓 태어난 이 아기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 작고 연약한 아기는 놀라운 인생을 사셨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각자의 신앙의 결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Beloved, 구유에 누인 아기로만 보겠습니까? 당신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점점 커져가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듯이, 구유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성장되는 믿음 가지시길... 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성탄이 주는 참 믿음의 진실을 찾는 성탄 신앙 가지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9절 봅시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한결 같이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이 같습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죄성을 지닌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있던 천사를 만났으니 말에요. 이거는 꼭 중죄인이 경찰을 보면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찰이 뭐라 그랬나요? 그냥 제 발이 저리는 거에요. 괜히 잘못한 것 같고, 피해야 할 것 같고... 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하나님을 직접 본다면 죄 때문에 말로 표현 못할 공포가 다가올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못 쳐다봤습니다. 그런 모세도요, 백성들 앞에서 위엄 있는 척하고, 잘난 척 했어도, 히12:21 보세요.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벌벌 떨다 왔어요.
우리 같으면요, 아마도 봉헌이고 기도고 상관없이 기절부터 했을 것입니다. 심장마비라도...
그걸 어떻게 아냐?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목자들도, 사가랴도, 마리아도 우선적으로 천사를 만났을 때 무서워했고,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난리를 쳤죠. 에스겔도 그렇고, 다니엘 같은 경우는 아예 기절했다가 며칠을 앓아 누었다 일어났어요. 단8:27a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기드온은 죽는 줄 알고 막 울었어요. 삿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이게 다 하나님 직접 만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쏘인 천사 보고 이런 겁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니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면 어찌되겠어요? 죄인인 우리는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천사 보내신 겁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 기쁜 소식이 곧 성탄의 소식입니다. 아이들 잘 받아먹게 후후 불어서 식혀서 준 거야.
❶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❷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기쁜 소식을 왜 천사들을 미리 보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는지 아시겠죠? 안 그러면 다 죽어요. 무서워서 쳐다보지 못해요. 이것도 지금만에요. 예수님 우리 앞에 오실 때까지 만에요.
어쨌든 천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로 평생을 주님 앞에 있도록 잠깐만 말을 전해주고, 표적도 보여주고 해서 우리 시선을 예수께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 뿐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니깐, 천사가 화를 내잖아요? 자기는 절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절과 경배는 오직 어린양 예수 우리 구주께만 돌리는 거라고.
천사가 딱 그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았기에 죄인된 우리 인생이 보기에 좀 두려울 뿐입니다. 아시겠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성탄의 복음입니다. 그들이 전해준 이 성탄의 복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눅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두렵지도 떨지도 않고 그저 평생 주만 섬기게 해 주시기 위해서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할.
핵심을 들어야합니다. “구주가 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합니까? 죄 때문에 그래. 그 인류를 죄와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시고,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빠짐없이 충족시키는 복을 주셔서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그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영생토록 섬기게 하기 위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직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이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겁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히브리어로 ‘메시야’. 선택된 자란 뜻이죠. 그러니깐 오신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수행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권능과 능력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교회를 섬길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았어요.할.
그리고 주이십니다. 어머어마한 호칭입니다. 성경에 20번 정도 사용되는데, 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정식 호칭(이름)으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깐 오직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권능이 주어집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깨닫도록 받아들이도록 표적도 보여주고, 기적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니, 이 말을 듣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변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마리아나 사가랴 때처럼 천사가, 평안하라~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느낄 수 있잖아요? 그 말씀을 다 깨달은 목자들이 가지는 평안함.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도 또한 주의 평안함으로 감사함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생각해보고자 하는 성탄에 대한 믿음의 진실은, 목자들에게 있습니다.
지난 주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 유대의 유력자들은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다 침묵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목자들은 당시로선 비천한 계급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런고하니, 그들은 직업상 양떼들과 같이 지내요. 짐승들과 같이 살다보니 자연히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 밥 먹기 위해서 손 씻고, 발 씻고 할 틈이 있겠어요? 그 들판에서. 그러니 자연히 유대의 정결법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거죠. 
그리고 이들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쳤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은 좀 다른 부류의 목자들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희생제물용으로 드려질 양떼들은 따로 관리를 시켰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이 목자들은 양을 키우면서 아주 조심해야할 부분이 바로 양을 흠 없이 키우는 겁니다. 자연히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이래되었던 저리 되었던 그들이 키우는 양떼의 소유가 누구의 소유이든, 어떤 용도로 쓰일 거라 하는 것 하고는 상관없이 이 목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이 보던 안 보던 간에 정직하고 성심껏 깨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은 거죠.
시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정직하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일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해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자 아네요?
다윗도 형들을 대신해서 밤새도록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럼 형들은요? 선지자 사무엘 보러 갔죠. 여기서도 하나님께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다윗을 쳐다보셨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낙심했을 수 있어요. 지금 여기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왕 될 기회는 싹~ 날라갔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정직한 자의 얼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얼굴을 보셨죠.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날까요? 그리고 설령 나타난다고 해서 아무 목자들이 다 아멘으로 받아들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긴 한데, 고집불통이 있어요. 그래서 정직한 건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가난하지만,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도 있어요.
결국 천사들은 어떤 목자들에게 다 나타날 수 있습니다. 꼭~ 천사 만나야하는 목자 없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시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예수를 우리 인생에서 구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표적이 있을 거라는 그대로 달려가서 그 표적을 확인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안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도망도 안 가고, 끝까지 자리 지키면서 천사의 말을 다~ 들은 이 목자들요, 은혜 받은 목자들입니다. 마리아나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날 때는 ‘은혜 받은 자야~’ 라고 했지만, 이들에게는 ‘은혜’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준 것도 은혜고, 그 자리를 지킨 것도 은혜고, 가서 확인한 것도 은혜. 첫 성탄 맞이한 것도 은혜고, 모든 것이 다 은혜에요.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성탄의 주일을 주께 예배로 드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생의 내용들이 장애가 되어, 이리저리 가로막혀서 이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나를 위해 구주가 오셨으니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합시다. 주님, 이 은혜, 예수를 내 구주로 알아보는 은혜, 내 구주가 되신 예수를 평생을 따라가는 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 은혜에서 절대 떠나지 않게 하시고, 주의 귀한 손에 꼭 붙들려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주 예수여 오늘 새빛의 온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19-1215  이 여자의 믿음  눅1:26-38

언젠가 ‘어느 감독의 죽음’이란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감독목사님이 기도하다가 하나님 음성 듣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얘기 기억나시죠? 이와 비슷한 사건이 눅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일을 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물론 그 감독과 같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 일이 있은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한 겁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깐, 38절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어요.
예루살렘에 사는 유명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갈릴리 나사렛 아주 시골 산골에 사는 이 여자가, 그것도 당시 나이라고 해봤자 불과 13살 정도인 소녀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기에 이토록 믿음이 좋은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 
오늘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들여다보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 나누게 되길...

먼저 천사의 소식을 듣고 “생각하매” 했다고 했습니다.
29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랍고 흥분이 되었을 건데, 사가랴처럼 그렇게 경악하는 대신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다른 말로 ‘내게 천사를 통해 이 말씀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한 겁니다.
보통 구약을 보면, “은혜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말로 접근하는 선지자나 천사들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고자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온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쓰실 건덕지가 없거든요. 지혜, 명철, 훈련, 양육 ...
26절 보면,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사마리아와 국경지대에 있는 산골입니다. 주로 도망자들이 숨을 곳을 찾아 스며드는 산골에요. 그걸 유대인들은 다 알아. 그래 당시 유행하는 격언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입니다. 빌립이 ‘나사렛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라고 하니깐 나다나엘이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생각에도 뭐 이런 산골까지 찾아와서 쓰시겠다니 마시겠다니 하냐? 
또 자기가 쓰임 받을 건덕지가 없는 이유가, 자신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하고요, 꼭 있잖아요? 우리나라 종가집에 찾아와서 ‘니가 태종 무열왕 40대 후손이야, 왕손이야 왕손.’ 하는 것처럼 ‘다윗왕의 28대 후손이야, 공주야 공주. 품위를 지켜야 해~’ 
아~ 그럴 때는 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게 도대체 현재 마리아의 위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망할 대로 다 망해서, 이 산골에까지 흘러와서 근근히 살아가는 살림형편에 과거에 빛나는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사명을 맡기실 만큼의 조건들을 갖춘 것이 어디에도 있질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 받은 자”라는 둥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둥의 말이 도대체가 감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에게 대해서 여러분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경험이나 교육적 수준을 볼 때, 지금껏 신앙 생활한 수준을 봐도, 하나님 위해 일 할 수 있는 후보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전혀 없다고 보십니까?
혹자는 말합니다. 마리아가 겉으로는 그래도, ❶그 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 만한 선한 덕이 있고, ❷영원한 처녀성을 지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쓰임 받기 충분하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반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런 것 없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굳이 함께 하셔서 마리아를 사용하셨다는 말.
마리아 말마 따라 34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예. 마리아의 모든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입니다. 그게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그렇기에 37절 말씀이 정답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할. 하나님 하신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분명하게 해야 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백번 천번 만번을 생각해도 준비가 안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정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제한하지 마시고, 천사가 하는 이 말씀에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할.
그리고 궁금하잖아요? 마리아도 궁금해 하죠?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누가는 마리아와 사가랴를 은근히 비교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사가랴는 제사장으로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하다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도 같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지만, 사가랴에 비해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만, 얘기를 들은 후의 서로의 반응은 그들의 급수를 바꿔버렸습니다.
사가랴가 아마도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18절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의심한 겁니다. 그래서 좀 더 확신할 수 있을만한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불신하는 속마음이 들통 났습니다. 그래서 아들 낳을 것이지만, 20절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의심의 댓가로 벌칙을 받은 겁니다. 
다른 표적 보여줄 수 없고, 애 낳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벙어리다~ 뭐 그런 말이죠. 
그에 비해 마리아는 당시 12~13세로서 요셉이란 남자와 정혼한 산골 처녀였습니다. 근데도 38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 말은 마리아가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❶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철저하게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❷ 또 주님이 자기 인생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고 주께 맡기기로 한 겁니다. 
물론 이 순종 때문에 겪어야할 고난, 조롱 불명예스러운 일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우선 인간적으로 이게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도 이 일이 이루어져서 임신을 했다가, 발각이 되면 남편될 요셉이 이 일에 동의를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여인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져 주겠습니까? 또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미친 여자라 할 거죠. 그래서 이건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신앙의 부분이라는거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신앙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가랴처럼 좀더 확신이 들도록,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보다는 사가랴의 예를 따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의심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겠다는 둥, 아니면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 무슨 이런 협박이 다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정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죄질이 나쁜 말투요, 생각들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믿음만은 가지고서 늘 걸으며~ 우리는 마리아의 단순한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가라고 하시는 길이 고난의 길이고, 절망할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여도 그게 하나님 말씀이면, 하나님 뜻에 겸손히 복종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새빛의 성도들, 또 이 말씀을 mp3로 들을 우리 새빛의 성도들의 장점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집입니다. 할. 참으로 힘든 이 한 해를 주님만 의지하고 나아왔죠. 그게 우리 장점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릴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히 주의 큰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할
우리는 그걸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맞으시면 아멘. 이게 우리 믿음의 장점에요.
오늘 둘째 말씀은 바로 그 기다림, 기다림을 어떻게 하냐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표적을 달라, 기적을 달라~ 하면서 조바심 있는대로 다 내다가, burn-out되어 버릴 수 있어.
독수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잡아서 쇠줄(체인)로 발을 묶어서 큰 바위에 매어두었습니다. 퍼득퍼득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하는데, 발에 단단히 묶인 체인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근데 사냥꾼의 어린 아들이 보기에 불쌍했던지 슬며시 풀어주었어요. 근데 독수리가 안 날라 갑니다. 그냥 바위 위에 앉아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burn-out입니다. 정말 무서운 겁니다. 그냥 포기하는 겁니다. 어떤 기대도 안 가져요. 더 이상 부흥을 위한 기도도 안 해요. 소망도 안 가집니다. 어떤 계획도, 시도도 하질 않아요. 그냥 이대로 가다보면 알아서 되겠지~ 혹시 이런 맘 있어요? 그게 burn-out된 모습에요.
예수님 오실 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페르시야보다 더 쎈 알렉산더제국이 나타났고, 그보다 더 쎈 로마가 나타났어요. 메시야가 와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대국이 나타났으니, 그만 메시야를 포기했습니다. 기다리는데도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잊고 살았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가 그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4절 “헤롯이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절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성경적 근거까지 대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너무 좋아서 동방박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별을 찾아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하는데, 과연 그랬습니까? 헤롯만 아이들 죽인다고 설치고 다녔어요.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기다림은 burn-out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함께 해 주실 줄로 믿는 기다림,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신 것이 없음을 믿고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저는 분명히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분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요,
감사한 것이 저녁때에 아무도 없는 교회 주차장에 와서 혼자 기도하고 가시는 분이 있대요. 지난 주간에는 또 다른 분이 새벽에 매일 나와서 기도의 메이트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세요.
아니 이렇게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37절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눈물흘리면서 주님께 요청한 것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 주실 믿고 기다리면,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은혜가 있을 줄
2019년의 성탄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여자의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

19-1208 2019년의 좋은 신앙 갈4:12-20
 
지난 주 우리는 율법은 구원의 문 앞까지만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인도로 문 앞에서만 서성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때가
​ 차매” 즉 하나님의 때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으로 이끄셨고,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구원 받은 이들이 한 눈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심을 알고 부를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뜨겁게 해 주셨습니다. 믿 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게 얼마나 좋았으면, 자신이 과거 율법 아래 있으면서 가졌든 모든 베네핏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이 Good News를 들고 갈라디아로 온 겁니다.
오늘은 우리도 이 좋은 복음을 받고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좋은 신앙은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13-14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 전하러 오다가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밤빌리아지방의 해안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안질 또는 간질 병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한 부분을 볼 때, 이게 간질이 아았을까~ 왜냐면 당시엔 간질을 악마와 연결시켰거든요. 사람들이 정말 불쾌하게 생각했어요. 15절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한 걸 볼 때 안질 같기도 하고요.
뭐든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거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3-14절이 하는 말이,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거에요. 이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저렇게 아프면서도 저 정도 열심인 것을 보면, 저기에 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겠냐~
정말 복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대단합니다. 사람들 생각하고는 너무 달라. 신기해.
어느 교회에 새 신자가 갔더니, 그날따라 장로님 부인되는 여집사님과 그 교회 권사님이 머리 끄댕이를 잡고 밥 먹다 말고 싸웠대요. 하필이면 그날따라. 새신자가 왔는데, 그 분 그 다음 주일 교회 나왔게요? 안 나왔게요? 안 나왔으면 말도 꺼내지도 않았겠죠? 왔어요. 왜 왔냐? 궁금해서. 장로 부인이 안 나올까, 권사님이 안 나올까~ 그게 너무너무 궁금해서 왔대요.
찬바람이 쌩쌩 불긴 해도, 둘 다 나왔더래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분 마음에 역사하시는데, 궁금증을 갖게 역사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들어간 거에요.
갈라디아 교회에도 분명히 이런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열정에다가,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고, 소위 은혜 받은 거죠. 이 둘이 딱 합치니깐 그들 마음속에 자기 눈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신앙의 열심히 생겨난 겁니다.
교회에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었고,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런 비전도 꿈도 없는데, 역사가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는 겁니다.
지난 주 중에 새벽기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놀랐기 보다는 감동이죠. 몇 개월 만에 어떤 분이 오셨어요.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근데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목사는 항상 걱정야. 보통 갑자기 오신 것은 무슨 급한 기도제목이 생겼을 때거든요.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새벽예배가 끝나자마자 물어봤죠.
아뇨. 그런 일 없어요. 모처럼 만에 새벽기도 나왔더니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쳐다보시는데...
좀 미안하기도 했고, 더 감사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기도하러 왔으니 성령충만을 받으라
어쨌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성령의 만지심 속에서 이게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우리가 이런 귀한 신앙, 좋은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열심 있는 신앙의 자리에 굳건하게 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겁니다.
진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세요. 하나님은 과거에 백번 천 번 잘못해도, 주께 나와 ‘예수님 죄송해요.’ 하면 다 잊어주셔.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회개했으니 니 죄가 다 희어졌는데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시는데, 문제는 우리에요. guilty feeling이 남아서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 괜찮다는데
물론 우리게 이 guilty feeling이 있는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겁니다. 계2:23b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행동한 게 좋지 못하니 회개기도하고도 마음이 찜찜하겠죠. 성경에도 이런 말씀 얼마나 많아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에서도 그래요. 계20:12 보세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기록된 자기 행위대로 심판 받는다고 했죠? 정말 두려운 일입니까?
안 찜찜하겠어요?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근데 자세히 보십시오.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무슨 책이라고요? 생명책
앞의 책들은 행위의 책입니다. 그기 해당되는 사람들은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받을 겁니다.
어떤 행위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랑을 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까지 불신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행위의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책이 펴집니다. 생명책입니다. 어떻게든 생명의 자리로 옮겨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눈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담긴 책이고, 은혜의 책입니다.
이건 행위에 따라 심판이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에 따라 적용되는 책입니다.
이거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착같이 우리의 과거를 다~ 들추어내실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 찾아내시는 건 우리 장점에요.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실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걸 잘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적발해 내셨습니다.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영접했다.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찾아낸 것들, 너희가 이렇게 한 것들이 다 너희에게 복이 되는 것들이다.
 
물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상황이, 사실은 별로 좋지 못한 때입니다.
16절 봐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으냐.” 원수가 되어 있대요.
17절b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간질 당했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갈 성도들에게서 어떤 것을 찾고 계세요? 하나님을 위한 선함,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것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들,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잘난 게 뭐가 있습니까? 맨날 불평만 쏟아내고 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나안으로 이끄셨어요.
작은 꼬투리라도 다~ 잡아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해주시면서 그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믿는 우리를 위해 그 날에 생명책이 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19-20절을 합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언성을 높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자.
해산할 때, ‘아~ 나 애기 낳아~’ 하면서 낳은 분 손들어보세요. 없어요. 악을 쓰면서 낳았지.
근데 바울이 다시 그 수고를 하려는 이유는 20절 말씀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의혹이 있다’는 말은 흔들리고 있다. 그들이 100% 다 돌아선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있는 이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하신다는 것 알죠? 바울도 하나님 마음 알아요. 그러니 18절서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나 좋은 거다. 이 좋은 신앙의 일을 다시 해보자~ 계속해보자 하면서 불물 가라지 않고 덤벼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 해 이 마음이어야 해.
이게 좋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이 주신 마음 갖고 나서 보십시다.
 
2019년 한 해를 보낼 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은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를 섬기는데 있어 열심을 품기 바랍니다. 기도의 열심도 내고, 찬양의 열심을 내고, 마음을 주를 향해 굳건하게 하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처음 이 땅에 초림하실 때도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은혜입니다.
세상 마지막을 다룬 요한계시록에도 ‘함께 하신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보세요.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눈물도 사망도 아픈 것도 없는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요, 좋은 신앙의 일을 열심히 사모하고 최선을 다해 주 안에 있으십시다. 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 결론으로 나누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알죠? 성경학자들은 이 기도는 원래 야베스의 어머니의 기도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기구한 운명 앞에서 의지할 이는 하나님 밖에 없어서,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그걸 아들이 듣고 같은 기도를 하고...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최고의 장점인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축복을 주신 거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뚫어지라 쳐다보고 계십니다. 축복해주실 장점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좋은 신앙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우리 이웃들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우리 불쌍히 여기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장점 정말 없습니다. 내세울 게 마땅히 없고, 보여드릴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의 장점의 꼬투리를 잡으시는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이 감사와 기쁨과 형통과 평안으로 주 안에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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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1   때가 차매  갈4:1-11

12월 첫 주입니다. 이제 2019년에 대해서 서서히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 가지 작업이 있겠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정체성을 확실하게 다지는 작업일 것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딱 되면, 2020년 뿐 아니라, 평생이 걱정 없게 돼.
Already와 Not Yet을 기억하시죠? 갈3장에서 바울이 이 부분을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족속에서 복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구체화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신 그 약속을 성취하셔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Already(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약속이 없는 사람들처럼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고 있냐?(1-4)
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어째서 다시 돌아가 종노릇을 계속하고 있냐?(5-8)
그래서 왜 아직도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의 이유를 찾고 약속의 축복을 회복하게 되길...


먼저 어째서 약속이 없는 사람들처럼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고 있냐?
율법이란 올바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밝혀주는 길잡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줍니다. 마귀는 우리 성도로 방향감각을 잃게 만들어요. 또 율법은 은혜를 알고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성숙해질 때까지 훈련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율법이 선한 거지만, 이 율법만으론 교회 문 앞까지만 올 뿐, 안으로 들어가질 못해요.
그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 율법의 특성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당시 로마의 관습을 예로 들면서 “후견인과 청지기”의 역할을 할 뿐이라 정의한 겁니다. 당시 로마에선 주인의 아들이라도 성년이 안 된 상속자는 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관리자 역할을 하는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자녀들이 맡겨져서, 그들의 지시를 따라서 지도를 받고, 훈육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언제까지 하냐면, 2절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유대에서는 12살에 성년식하고, 우리는 19세면 성년이 됩니다. 그래서 ‘19금’이라 하죠? 
근데 로마에선 나이 제한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전적으로 그 시기를 정했습니다. 보통 3월17일에 전국적으로 ‘리베랄리아’라는 성년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때 가장은 상속자에게 성인용 토가(겉옷)을 줍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되면 옛날에 상투를 트는 것처럼 이거 입고 다녀.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3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이 말 뜻은 우리가 만세 전부터 택함 받은 자녀였습니다. 예수를 내 구주로 믿어지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약속의 후사지만, 아직은 실제로 그 약속의 유업을 받지는 못해서, 미성년 자녀처럼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박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첫째로는 율법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우주의 초보적 영이라 해석하는데, 땅, 불, 공기, 물 또는 해달별, 우상들 있죠?
10-11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게 우상입니다. 8절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마귀나 악한 영들에게 종노릇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성도를 속박하는 율법이 사탄의 악한 계획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이고, 나쁜 영이 아닌 선한 천사를 통해 중보된 것입니다. 문제는 사탄이 이 좋은 율법을 자신의 악한 목적에 맞게끔 그 내용을 뒤틀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후견인이 아버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이를 학대한 겁니다. 마귀가 하나님께서 전혀 의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학대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를 드러나게 해서 사람들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밖에 없게 하신 겁니다. 근데 사탄은 율법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드러난 죄 때문에 주님께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결국 하나님 주신 율법의 은혜로운 면을 상실해 버리고는, 사탄의 속임에 빠져서 어떻게든 ‘행위로 자신을 구원해보려고 애를 쓰게 된 겁니다.’ 소위 행위 구원이죠.
그래서 드러난 죄를 감추려고 하와처럼 무화과나무 옷을 만들어 입으려 기를 쓰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는 신앙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못하고, 찬송도 안 나오고, 성경 보기도 싫고, 자기 생각에 정상적인 신앙인으로서의 행동이 안 나오기 때문에 늘 고민해. 이거 한번 하고 안하고에 따라 구원이 되고 안 되고 그런 것 아니잖아요? 근데 그기에 목 매달아.
주의 일에 태만한 것 때문에, 주님 맘에 들도록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고민합니다.  보세요. 율법은 이런 우리 게으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됨을 알려주는 것까지가 율법의 역할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죠. 율법은 문 앞까지만 우릴 인도한다고. 근데도 율법적 행동을 하면 문 안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죠. 언제까지 구원의 빛이 아닌, 은혜의 빛이 아닌, 행위로 여러분의 마음을 보상받으려 하십니까? 


두 번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어째서 다시 돌아가 종노릇을 계속하고 있냐?
4절a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란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메시야가 오실 때가 다 준비되었다는 말입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온 지중해 세계에 모든 도로들이 잘 정비되었습니다. 어디든 로마군인들을 빠르게 투입시키려는 의도였지만, 그 일로 인해 왕래가 쉽고 빨라지고, 복음이 그 길을 타고.
언어도 세계 공용어란 게 생겼습니다. 헬라어로. 어딜가든 ‘그리스도’하면 다 알아들어.
당시에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적 신들의 인기도, 모세의 율법의 인기도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만족스러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을 단숨에 뒤집어엎는 참다운 신이 올 거라면서 기대하는데, 그 빈 칸에 메시야를 넣어보세요. 답이 나오는 거죠.
이런 모든 준비 됐을 때, “때가 차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을 완수하기 위해 보내신 분은 완벽한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할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잖아요? 
또 전적으로 인간이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그러면서 사는 내내 율법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셔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율법의 모든 의를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성에서나 신성에서나 의로 보나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불의한 사람들을 구속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구원의 큰 역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릴 해방하셨는데, 다시 율법을 찾아가서 율법의 요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뭐냐는 거죠. 오직 예수면 돼.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보내셨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앞에 5절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첫째가 속량 즉 구속이고, 둘째가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입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 있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자신감이 생기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에서 아들이 없을 때, 젊은 노예를 아들로 입양해서 양자로 삼습니다. 그래놓고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는데, 젊은 노예 입장에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겠죠. 어서 부르고 싶죠. 그래서 정식 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근데 적어도 태어나면서부터 20여년을 ‘주인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쉽게 나오겠습니까?
우리도 그럴까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선물을 주신 겁니다. 아들의 영인 성령님 보내주신 겁니다. 그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하시려고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셔서 아들 됨을 확신시켜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자녀된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빠라 자연스럽게 부르라고
지금도 생각해 보건데, 저에게 있어 제일 먼저 다가왔던 것은, 예수님이 그냥 너무 좋았어요. 설명하라고 하면, 말 재주가 없어서 못 해요. 성령님 이끌어 주시는 마음껏 기도하고 바라니깐 여러 가지 은사와 표적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보이는 이적과 표적보다는 기도할 때요, 조용히 저에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너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야. 두려워말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얼마나 좋은지, 그게 알고보니 이 말씀이셨어요.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이젠 돌아갈 수도 없어요. 사나죽으나 오직 주를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날 위해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셨음을 확신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할
Amazing Grace의 존 뉴턴(John Newton). 일곱 살 때 어머니 잃었고,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뱃사람이 되어서,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했습니다. 스물세 살이던 1748년 3월 10일에, 자신이 탄 배가 무시무시한 폭풍우 속에서 가라앉아 버릴 만한 절박한 순간에, 그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는데, 그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절대 잊지 않았고, 자신이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지 부지런히 기억하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신15:15의 말씀을 굵은 글씨로 써서 자신의 서재 벽난로 선반 위 벽에 걸어 놓았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한때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기에 서 있는 자들임을 기억합시다. 이것만 제대로 한다면 2019년 20년 만이 아니라 평생토록 영생의 축복과 자유케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알맞은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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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4 2019년의 감사신앙 고전1:4-9
 
추수감사주일하면 매년 꼭 나오는 말이 ‘May Flower'호죠. 교회 절기이기에 그렇습니다.
절기란 특별한 어느 때나 날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날을 성도들이 지키는 신앙적인 기념일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의 7대 절기가 있고, 우리 교회에도 신년주일,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에, 성령강림일, 종교개혁기념일 해서 7개의 절기를 지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은 역사적으로 구약의 전통과는 상관없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한 해를 지내게 해 주신 것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겠다~ 또 앞으로 이곳에서 사는 동안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는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중인 A.D. 50년경에 개척했습니다. 그로부터 대략 4-5년이 지난 A.D. 55년경에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전하는 편지인데 고린도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감사하는 부분이 담겨 있습니다.
4절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5절 “모든 일에 풍족하게 해 주신 은혜.” 8절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주시는 은혜.” 정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함이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거죠. 오늘 이 말씀 통해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혜를 알고 감사하십시다.
 
먼저,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5-6절)
헬라인들은 선천적으로 철학적 지식과 사고에 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이스 각 도시에는 시민들의 광장인 아고라가 있고, 바울도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기 모여서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지식을 서로 말하고 교제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근데 오늘 말씀 보니깐, 원래부터 언변이 능하고, 지식이 뛰어난데다, 주 안에서 은혜를 받아버리니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달변가 eloquent. ‘박식가’가 된 겁니다.
복음 전하는데 언변이 풍족해지니깐 말하는데 막힘이 없어요. 지식적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이 넘쳐나게 되니깐, 복음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고, 구원의 확신, 그 어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신앙의 확신이 들어선 겁니다. 이 신앙 갖고 복음 전하니 그 결과가 어떻겠어요?
여기에 우리가 눈여겨볼 하나님의 역사요, 감사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있는 재료들에다가 은혜를 더해주셔서 주의 일을 더 잘 감당하게 해 주십니다. 오늘도 보니깐 원래 언변이 능한데다 더해주니깐...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다윗은 물맷돌을 잘 던졌습니다. 사자도 곰도 그거로 쫓아냈다고 했잖아요? 그기에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더해지니깐, 골리앗 앞으로도 담대히 돌 들고 나가는 겁니다. 역사가 나타나.
사르밧 과부요, 있던 것은 고작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몇 방울이었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들이잖아요? 그걸 갖고 도대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근데 그 있는 게 많든 적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이 더해지니깐, 하나님의 결단케 해 주시는 만져주심이 더해지니깐,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밀가루 통에 밀이 떨어지질 않았다고 했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회에게 주신 은혜가 이겁니다. 그냥 말 좀 잘하고, 뭘 좀 안다가 아니라, 달변에다가 박식을 더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지식을 넓혀주셨고, 그들 마음속에 신앙이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해주시니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게 된 겁니다.
이 한 해 동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더해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 소망, 열심을 간신히 갖고 있는데, 그기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보이십니까? 이런 것 갖고 뭘 할까 싶은데,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왜 그리도 귀에 착착 달라붙는지, 마음이 왜 그리도 부하게 풍성하게 느껴지는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진 어떤 부분을 주께서 풍족하게 하셔서 어느 정도로까지 견고히 일어서게 하실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더욱더 풍성케 해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감사하십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입니다.(7절)
사실 고린도교회 만큼 문제가 많은 교회가 없습니다. 온갖 범죄에다가,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사람 차별 있는 대로 다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뭉쳐서 다녔고, 사랑을 얼마나 베풀지 못했으면 고전13장 한 장을 통째로 들어서 사랑장이라고 해서 사랑을 설명해줘야할 정도고, 게다가 이단은 이단대로 얼마나 설치고 다니는지... 바람 잘 날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근데 그런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은사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도대체가 이 문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지...
그럼 우리 교회,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이 한 해 동안에 어떤 선물을 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해 주고 계신지... 생각해 보니깐요, 참~ 힘든 한 해였는데, 그동안에 신앙을 잘 간직할 수 있는 은사를, 주의 몸된 교회를 흔들리지 않고 잘 섬겨나갈 신앙을 선물로 주셨더라고요.
더 궁금한 것은 왜 주셨을까?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뭘 원하실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고 은혜의 선물을 부족함 없이 주신거더라고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는 말은 주님을 사모한다. 주님 만나길 사모하는 신앙, 사모하는 마음. 주님 만날 때까지 기다릴 신앙의 깊은 마음을 주신 겁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 주님을 만나게 됩니까?
잘 믿고 신실한 사람인데 한나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온갖 핍박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런 일 없어야 하고, 또 신실한 성도의 기도는 들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근데 한나가 오랫동안 기도한 것 같은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더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은사이겠습니까마는 하나님께서 한나로 기도를 끝까지 할 수 있는 인내와 갈급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응답주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얼굴 보지는 못했지만, 아들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아들 셋에다 딸 둘까지 더 주신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주님 만나는 게 뭐냐? 언제 주님 만나냐?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아는 때 그때입니다.
저는 사고나서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 제게 오셔서 ‘내가 너의 기도 소리를 들었고, 너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안심하라.’ 그러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는데, 얼마나 시원하고 평안한지..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심을 아는 은혜의 선물을 받은 거에요.
호레이쇼 G. 스패포드라는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요, 법리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아내와 네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1873년 시카고 대화제가 발생해 당시 섬기던 무디교회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재정을 맡고 있었기에 먼저 가족을 보내고 자신은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근데 대서양에서 새벽 2시에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충돌했습니다. 아내는 네 아이들을 이끌고 갑판위로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30분도 채 안 되는 동안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해 버렸고, 부인만 익사직전에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9일 후 부인으로부터 ‘혼자 구조됨’ 이란 전보를 받고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배가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밤새 아픔과 슬픔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새벽 세시 경에 사고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막 생각을 머릿속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그래 종이를 꺼내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 주신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내게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를 들은 겁니다. 생각나게, 눈물 흘리게, 닦아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심이 주님 만나주시는 시간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 은혜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알고 보니깐요, 이렇게 모든 믿음의 선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 손 꼭 붙잡아주신 거더라고요. 우리 손을 놓아주시지 않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신거더라고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붙들어 주심 감사합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해 주심에 감사함입니다.(8절)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은 뭡니까? 그리스도의 날은 현세가 끝나는 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들은 이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감사한 것은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살고 있는 그가 보게 된 겁니다.
그건 계시록에서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4:1-11 보면, 하늘 문이 쫙 열리면서 천국의 중심에 하나님 보좌가 있었고, 보좌 앞에는 어린 양이 서 있고, 하나님의 일곱 영이신 성령님이 계시고,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둘러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다음에는 24장로들이, 그 다음에는 천군천사들이 빙 둘러 섰고 그 뒤엔 구속 받은 모든 성도들과 모든 만물들이 둘러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11절a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저절로 이 고백이 나오는 거야.
언젠가 성경을 일독하고 자던 날 밤에, 천사들이 하늘을 빙글빙글 돌면서 민방위 사이렌보다 더 큰 소리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 나와서 맞이하라~’ 외치면서, 익준아 니도 그기 있구나~ 당연한 것이지만, 마지막 때에 제 이름 정말 불리고 싶습니다. 나도 그 찬양대 속에 파묻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싶고, 부활하신 예수님, 재림하신 예수님 꼭 만나고 싶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싶어요.(x2) 두손 모아 기도할 때 응답해 주세요. 응답 받고 싶습니다.
당연히 주께서 주의 날이 올 때까지 제 손 꼭 잡아주실 것이지만, 저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천국소망신앙, 여러분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우리 이 신앙 같이 가집시다.
우리가 기도하십시다. 이 신앙, 이 은혜를 주님 주셔서, 천국소망 신앙 갖고 주의 날이 오기까지 끝까지 견고한 신앙의 사람 되게 해 달라고. 더 깊은 감사를 마음껏 누리게 해 달라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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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7  빛의 자녀들이여  엡5:1-8

총신 동문회에 회장을 맡다보니, cruise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억지로라도 가야만 했습니다.  
모빌에서 출발하는 배라 롬과 어거스타, 둘루스에서 길목에 있는 저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8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좀 일찍 오신 분들과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던 중에, ‘저는 시민권자라 한국여권과 Green Card 둘을 준비하는 번거로움은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모님 한 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아니 여권 가져와야 하는 거에요?’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남편 되시는 목사님에게 ‘왜 그런 것 챙기라고 말을 하지 않았냐~’는 겁니다. ‘당연히 가져올 줄 알았지~’
그래 부랴부랴 두 분 목사님이 이 노 부부 목사님과 함께 둘루스로 가서 여권 찾아서 배가 4시30분에 출발인데, 4시10분 즈음에야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얼마나 맘고생했는지, 뭐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배를 다 타게 되어, 참 추억 많은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어차피 배는 타기로 이미 e-수속 다~ 했고, 요금도 다 지불했고, 그러니 배 타는 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어요. 단지 패스포트를 두고 온 것일 뿐이지. 같이 가려고 다들 얼마나 애를 썼던지 결국 다 등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해결될 수밖에 없던 거였습니다.
오늘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랬습니다. 먼저 ‘빛의 자녀가 누구냐~’를 그리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조건이 뭐냐~’를 생각하면서 이 말씀 통한 은혜 받게 되길 바랍니다. 할.

오늘 1,2절에 이에 대한 실마리로 두 개의 과거완료형 동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여기서 주어는 안 나왔지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 이미 사랑을 입은 자녀들같이.’ 이런 뜻입니다. 그게 1절이고, 2절에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게 과거에 이미 완료된, 다시는 절대 반복될 수 없는 겁니다. 믿아.
공통된 단어가 ‘사랑’인데, 그 방식이 사랑을 입다, 사랑을 해주셨다. 어떤 사랑이냐면 2b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어떤 하나님 사랑을 입었다는 말입니까? 아담 이후로 우린 다 죄인입니다. 그 말은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이 구원받게 되도록 해주시는 사랑을 입었습니다. 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착각이죠. 그중 가장 빠지기 쉬운 착각은 혹시나 내가 착하게 살면 예수 안 믿어도 구원받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성도들 가운데 이래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아주 많습니다.
착한 일, 착한 행동 많이 하면 되지 않겠나~.  착하게만 하면 될꺼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말 착각입니다. 착하게 살면서도 뭐가 꼭 필수적으로 필요해요?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것. 이게 안 되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꼭 예수 믿어야 해.
뭘 많이 배우면 예수 안 믿고 예수에 대해 많이 몰라도 구원받지 않을까? 이것도 착각입니다.
많이 배워서 아는 게 많으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근데 전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시험 치는 학생들이 왜 혼동 스러워 해요? 많이 알아서 그래요. 정확하게 말해서는 좀 알기는 알아도, 정확한 걸 몰라요.  그러니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그래서 뭘 찍을까 헤매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 신을 알고,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예수를 내 구주로 믿어야 그게 100% 정답에요.
그럼 돈 많으면 그 돈 갖고 이일 저일 보람차고 선한 일 하면 예수 없이도 구원받지 않을까?
1억불짜리 cruise가 있대요. 저는 이번에 378불짜리 갔는데. 매일 정식 코스로 먹고, 대단했는데, 1억불짜리면 그 대우가 어떻겠습니까? 이런 사람들 평생 왕 같은 대접을 10일 동안 받아보기 위해서 평생을 두고 돈을 모은 답니다. 근데 보세요. 그런 cruise는 기간이 10일이랍니다. 그럼 뭐에요? 주일이 끼어 있는 거에요. 이번에 가서 봤지만, cruise라는 게 먹고 노는 것에 5박6일이 딱 맞춰져 있더라고요. 먹고 파라솔 밑에 누워서 자고, 스파하고, 잠깐 나가서 쇼핑하는데도 하루가 바쁘더라고요. 예배드릴 시간 과연 있을까요? 이거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리는요, 아무리 많이 먹을 것이 있어도 놀게 많이 있어도 예수 믿으면서 먹고 놀아야 해.
아무리 많이 알고, 많이 가져도요, 우리 삶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께 맞춰져 있지 않으면 구원받는 자리에 서질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 때가 되면 예수를 잘 믿게 될 것이다?’ 그거 착각입니다. 이런 분들은 빛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빛의 자녀냐?
주님이 끝까지 찾으러 오는 사람이 빛의 자녀입니다. 앞에서 말했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니깐, 패스포트 안 가져왔다 하니깐 여기저기서 최선을 다해 갖고 오게 해서, 기어코 천국호 안으로 데려 왔잖아요? 그 사람이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라서 예수께서 그걸 허락하신 겁니다.
아까 말한 분들요, 여권 가지러 가면서 자기 가방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걸 두고 갔어요. 만 갔어요. 게다가 그 가방 안에 남편 목사님의 패스포트가 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걸 모르고 짐을 부쳐 버렸내요. 와~ 둘루스로 간 4명 중 문제가 없는 두 사람은 3시40분경에 배에 들어왔습니다. 문제는 또 이 두 분에요. 돌아갈테니 refund를 해 달라. 못 해준다~ 시간은 가고 있고, 결국 어떻게 해서 가방 찾아서, 그 안에 있는 패스포트를 요원에게 또 그거 받은 다른 요원이 뛰어가서 전해줘서 간신히 4시10분경에 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가 누구냐? 
마지막까지 주님이 절대 그 잡은 손을 놓치지 않게, 끝까지 이끌어 들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절대 손을 놓지 않으시더라고요. 더 귀한 것은요, 본인들이 그걸 아는 거에요. 우리가 뭐라고, 우린 늘 생각하잖아요? ‘어느 정도 신앙 수준에 이르러야 되는데, 예수 믿은 지 몇 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잖아요? 어느 정도 거룩해져야 되는데, 충성도 열심도 내야 하는데, 아직도 별로 잖아요? 그동안 그 수많은 죄악, 불순종, 불충성, 우리 눈에도 다 보이는데, 예수님 눈에는 얼마나 확실하게 보이겠습니까? 근데 왜, 예수님은 우리 손을 놓지 않고 계신거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처음 믿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귀하다 놀랍다 그 말 밖에 안 나와.
끝까지 손 놓치지 않아주신 주님, 끝까지 이끌어 주신 은혜. 이 은혜 받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해 주심입니다. 우리 공로 없어요. 오직 예수 은혜뿐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8절 말씀입니다.
앞에 1, 2절에서 과거완료형을 소개했죠. 마찬가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현재 진행형 두 개가 나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절에서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이게 완료형이 아닙니다. 진행형입니다. 과거에도 진행 중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진행하는 중이고, 앞으로 계속 할 것입니다. 이게 그 한꺼번에 탁 올라오라는 것 아닙니다. 
근데 여기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어요. 진행되어 온 거라고 했죠. 근데 주님 위해 살아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떤 헌신도 열심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준이 쫙 올라가지나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걸 신학적 용어로 ‘종말론적 성화’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갑자기 온다 했죠? 그처럼 어느 날 갑자기 확~ 변화될꺼다? 아무런 전진도 없고, 진전도 없고, 일하기를 한없이 주저하면서도 앞으로 뭔가가 확~ 달라질 날이 올거다. 그러는 거에요.
케네디 대통령도 이런 말 했습니다. 국가가 너를 위해 뭘 해줄까를 생각하기보다 먼저 니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냐를 생각해봐라. 비슷하죠? 우리가 국가의 한 백성들로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연구해서 든든하게 그 부분을 담당해 나갈 때 부유해지고, 힘을 가진 국가는 우리 생각하던 것보다 많은 배네핏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을 1절에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라고 말한 겁니다. 여기서 ‘본 받는’이란 말은 ‘모방하여 흉내 내는’ ‘거울을 보고 닮으려고 크게 노력하는~’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를 맡은 사람도 ‘적어도 거울 보면서 1천 번 이상 대본을 읽어본답니다. 심지어는, 올해 6월에 MBC뉴스에 나온 얘기인데, 어느 연극배우가 피부과 원장 역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원장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그러다가 직접 시술까지 해 버릴 정도로 했답니다. 물론 돌팔이라 환자 얼굴에 점 뺀다고 하면서 화상을 입혔대요.  
우리는 예수를 더 알고, 예수를 더 닮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다가가고 있는 중입니까?
우리는 꾸준히 목표를 그리스도로 삼고,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삼고 달려가야 합니다. 
여기서 ‘본 받는 자가 되고’라고 말 한 건 본 받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들이 있다는 거겠죠?
아까 했던 이야기 좀 더 하자면요, 패스포트 두고 오는 바람에 모두가 고생 엄청 한 겁니다.
천국행 배를 타는데, 마지막까지 얼마나 마귀가 방해를 하는지, 만약에 밖에서 Deal을 해서 refund 받고 돌아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던 일이었어요. 
그래도 우리 발목을 잡는 것들에 걸려 넘어져선 안 돼.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최선 다해야 해.
그보다 정말 중요한 것,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우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것들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3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이런 것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4절에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은 하지 말고, 돌이켜서 감사하는 말을 해라.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그 보다 더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5-6절이 그 내용입니다. 
5절에서 우리를 속이게 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게 하고, 6절에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말 없어.
이 말은 그들이 우리에게 와서 속이게 되면,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어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기업이 없습니다. 천국은 갔는데 기업이 없다면, 그는 나그네입니다. 거지입니다. 그 곳에서 거할 수가 없는 거에요.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천국에 들어는 갔는데 기업이 없다(?) 그기서 나그네가 되었다. 천국에서 거지가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기에 바울의 중심이 담겨 있는 겁니다.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이 불순종의 사람들,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리에서 멀어지라. 그렇게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믿었으니 저절로 잘 될거다. 저절로 때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괜찮아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별로이지만 나중에는 괜찮을 것이다. 아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세월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부림과 인내와 눈물과 기도와 땀만이 해결해 줍니다. 
결코 우리의 손을 잡은 예수님, 우릴 놓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기 위해 한 걸음씩 최선을 다합시다. 성경통독 지난 주간 동안 못했습니다. 저랑 같이 합시다. 저도 2개씩 들어야 해.
눈물과 기도로서 한 걸음씩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빛의 자녀들 되십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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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0 성공적으로 가자, 천국 길 계2:18-29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현재 시점에서부터 미래에까지 우리가 목표로 정해야할 곳이 어디인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방향계입니다.
아틀란타에서 여기 뉴난까지 1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입니다만, 그게 그토록 멀리 느껴지는 것은 중간에 다운타운이 있어서죠. 10마일이 채 안 되는 그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가다가 서고 또 서고 하는데... 하여간 다운타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계4-22장까지가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우리 성도들이 나아가는 과정인데 그기에도 이런 폭탄이 있습니다. 대 환란이죠. 사탄이 못 지나가게끔 전력을 다해 막고 서 있는 겁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죠,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을 보내서 혼동스럽게 만들죠. 그래서 신앙의 본래를 잃어버리고, 도대체 지금 영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분별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깨어있어야 하고, 핍박과 환란이 와도 견뎌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적은 능력이지만, 그것 갖고서라도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믿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1:4),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이(5)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속히 오셔서 생명의 면류관도 주실 것이요,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해주실 것이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주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해 주실 것이다. 할.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다 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평생을 두고 신앙생활 하면서 건너야할 강을 건너서 가야할 곳이 하늘나라.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그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자, 그럼 어떻게 해야 주님 바라보며 이 천국길 성공적으로 갈 수 있을까요? 답을 얻읍시다.
 
먼저 예수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신앙을 가지면 됩니다.
두아디라는 옷감 제조와 염색 공업, 가죽 가공, 청동 기술이 발달했고, 도자기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만큼 각각에 맞는 상인들과 공인들의 조합이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제우스의 아들로 여기는 황제숭배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입니다만, 그들만의 특정 신이 없었기에, 다양한 신들을 숭배했고, 그래서 각 상인들 조합들마다 자기들의 수호신이 있어서 매년 그를 위한 축전을 열리곤 했습니다.
이런 두아디라에 편지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도시와 교회를 다스리시는데, 어찌 사람의 아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우상숭배 행위를 하고 있느냐 묻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다’ 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그 속의 사탄의 의도도 그렇고, 그것을 이용해서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악한 자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도 없습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 같다.’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 자리를 정하시면 어느 누구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봉사도 아닌데, 우상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영원한 구원자되심을 바로 알고 예수님만을 굳건하게 잘~ 믿는 게 바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주님 마음을 상당히 기쁘게 해 드리는 겁니다. 할. 우리가 그래 믿으면 천국 길 활짝 열리는 겁니다. 이 세상 모두의 중심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임을 압시다. 할.

두 번째로 장점을 살리고 지키는 신앙을 가지면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장점은, 바른 믿음을 가진 거라 했죠.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바른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져 갔습니다.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건 아시죠? 다들 인정들 할 것입니다.
요즘 통 큰 통독. 왜 통 큰 통독으로 했냐면, 통 크게 결단하지 않으면 이게 잘 안 돼요. 보통 30~40분 동안 앉아서 듣든지, 운전하면서 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집중이 잘 안 될 겁니다. 제대로 하려면 성경을 보면서 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습니까? 시작할 때 벌써 ‘하이고~ 이래갖고 언제 다 듣냐’ 싶은 게, 막 앞으로 돌리고 싶어요. 갑자기 전화도 오고, 누가 막 부르기도 하고... 제일 힘든 건 제 마음속에 할 일들이 막 생각나는 거에요.
예로 든 것이지만, 이거만으로도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죠? 그래도 해야 해. 힘들어도 자꾸 마음잡아 매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 부분에서 주님의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두아디라 교회에 신앙 성숙을 방해하는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두아디라엔 수많은 조합들이 있었다 했죠. 참 조합이란 게 좋은 겁니다.
기술을 교환하고, 물건을 원활하게 유통시킬 루트를 찾아내고,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수호신을 정하고 축제일을 만들고, 내일이 빼빼로데이죠? 빼빼로 많이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낸 것 아시죠? 발렌타인테이는 초코렛 장사들이 고안해 낸 것이고, 뽀빠이 도와주세요? 그러면 뽀빠이가 시금치 먹고 힘을 얻고 팔뚝이 이따 만큼 되어가고서는 미국 시금치농장 작품야.조합이 혼자서 안 될 일을 모여서 지혜도 짜내고, 장사도 잘 되게 하고, 정말 유익한 단체야. 이런 조합과 조합원들의 마음이 다른 길을 갈 때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생긴 문제입니다. 그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예수를 믿고 나니깐, 우상 숭배하는 거며, 조합원 파티하면서 뒤풀이로 음란행위 하는 거며, 신앙의 양심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는 거에요. 근데 사실 조합원으로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나만 특별히 excuse해 달라고 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건 경제적 자살행위죠.
이게 우리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있는 큰 도전입니다. 고민거리죠.
우린 어느 정도 이 시대의 표준과 관습들을 받아들이고 채택해야 하나?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도대체 어디까지로 선을 그어야 하나~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어요. 그렇잖습니까?
동성애 어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한국 축구응원단 명칭이 ‘붉은 악마’죠. 이걸 문화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것조차 거절해야 하나? 하필이면 붉은 악마가 뭡니까? 악마. 거부감 들게.
19절b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한 걸 보면, 두~교회는 정말 애매하고, 분별하기 어려운 신앙의 흔들림 속에서 믿음도 지키고 성도 안에서의 사랑도 섬김도 잘 지켜내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교회죠. 우리 교회도 두 교회 따라가는 자랑스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 번째로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면 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를 들여다보면, 서머나나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고 거짓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라오디게아는 교만이 큰 거짓 선생이었는데, 두아디라교회에도 만만찮은 거짓교사가 있었어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입니다. 이 이세벨이 두아디라교회 감독의 아내의 이름이었는지, 구약에서 대표적 악녀인데, 그렇게 표현을 한 건지, 아니면 삼바티 신전의 무녀의 이름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면서 온 교회를 오염시킨 겁니다.
이 이세벨의 특징은 적당한 은사도 받았다고 하면서 신령한 척하기도 하고요, 말을 잘합니다. 시민으로서, 조합원으로서 그냥 자리만 잠깐 참석해 주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라고.
아~ 성도로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이겨내려면, 사탄이 어떻게 공격하는지 그런 것 한번 경험도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사탄의 깊은 것”도 알아야지... 많은 이들이 혼동스러웠는데, 소위 성경을 잘 알고 존경받는다는 이가 면죄부를 달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좋은 신앙 장점을 갖고 믿음과 사랑과 섬김과 인내를 지켜나가던 성도들이 픽픽 쓰러져요.
이 부분에 대해 예수님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21절에서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그건 죄야. 자의든 타의든 여기에 조금이라도 동조했던 마음이 있으면 회개해야 해. 참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한 주님 마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이 죄라고 우리에게 지적하고 계십니까? 그 말을 듣고 혹 한 것이 죄입니다. 흔들린 것도 죄입니다.
왜 그러냐면 죄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저 시민의 의무를 지키려 한 것이지 이래 큰 건 줄 몰랐습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 회개하지 않는 것도 대항하는 거에요.
이세벨에겐 세 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두아디라교회에는 한 번 더 많은 4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경고를 했고, 침상에 던진다고 했고, 큰 환난 가운데 던진다고 했고, 네 자녀 중 하나를 죽이겠다 했습니다. 그럼 우리에겐 몇 번의 기회 주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여러분 각자만 알고 있는 부분일 겁니다. 다른 이는 모르지만, 속으로 계산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저런 흉흉한 소식이 들리는 것은 하나님 주시는 기회입니다. 누가 아프다, 다쳤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귀에 들렸다는 것은 특별히 나를 찍어서 하시는 주의 말씀인 겁니다.
이거 아시죠. 사울왕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왕은 그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나단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을 때,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아이가 죽어갈 때 벼개가 젖을 때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 위대한 왕~
두아디라 교회의 장점도 이세벨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돌아선 것입니다. 회개하는 신앙 가졌어
24절a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유혹을 잘 이겨낸 성도들이 두아디라에는 많았다는 거에요. 복된 교회.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 말씀대로 다시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나중이 더 좋고, 성숙해지도록 굳건하게 지켰다는 거죠. 빌라델비아 교회도 3:8b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장점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회개합시다. 내려놓읍시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굳게 붙잡은 것과 같은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십시다. 성숙한 신앙 가지십시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오지는 못했지만, 몸부림을 치고 있는 분들, 모두가 다 우리 교회의 희망이고, 예수님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적은 이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됩니다.
 
그럼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 은혜 주실 줄 믿... 28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여러분 새벽별은요, 동트기 전에, 밤이 가장 어둡고, 춥고 할 때 나타납니다. 이 새벽별이 나타난 거는 새벽이 오고 있다. 날이 밝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불꽃같은 눈의 빛으로 악을 폭로하시고, 없애주시고, 약속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소망 이루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좋은 신앙 갖고 성공적으로 이 천국길 나아갑시다. 주님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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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 축복되게 살아갈 비결 전3:9-14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고, 하나님께 기도로 지혜와 부를 얻었습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봤습니다. 그렇게 인생 찐~ 하게 살아본 결과 2-8절에서 28가지 ‘때가 있더라.’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행복합니까? 인생이 마냥 즐겁습니까? 우리 인생이 보면, 울 때도 있었고, 슬퍼할 때가 있었고, 괴로워할 때가 있었던 반면, 기쁠 때도, 웃을 때도, 감사할 때도 있었죠?
해 아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다 우리 곁을 떠나고 변하고 그럴 겁니다. 전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그 심을 것을 뽑을 때가 있고, 다칠 때가 있고, 다친 것을 치료할 때가 있습니다. 자꾸 바꿔요. 그럼 이 때를 누가 정하냐? 우리 스스로 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긴 역사 속에서 지금이라는 잠깐의 시간 동안, 각각의 맡은 자리에서 정한 때에, 잠시 서 있다가 사라지고 덧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때를 누가 정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시간과 삶의 주인이십니다. 기한도 다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가 정하고 싶어도 못하죠. 우리는 단지 이 긴 역사의 한 조각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한 조각일 뿐이래도 한 없이 시간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제한된 시간입니다. 마감시간이 있어요.
그러니 우리게 주어진 때를 가장 알차고 보람되고 축복되게 살아갈 비결이 뭘까 생각해야 해.
 
먼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 뭐냐면, ‘당연히 천국이 있는 줄 알았는데, 죽어서 가보니깐 없어.’ 그럼 얼마나 황당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예수님 부활하심과 영생을 주심을 철썩 같이 믿고, 신앙생활에 정말 열심이었는데, 그게 다 꽝이었다면 정말 우리는 엄청 불행한 사람들인 겁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겠죠?
반대로, 천국은 절대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구원도 영생도 다 가짜인줄 알았는데, 진짜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이것도 정말 끔찍한 일이죠. 유대인 중에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영생도, 천국도 믿지 않았습니다. 근데 죽어서 보니깐 진짜 천국이 있다면 그들의 표정이 어떨까요?
둘 중 하나입니다. 천국이 있다, 없다.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긍정적인 것을 고르는 게 이롭지 않겠어요? 그러면 설령 천국이 없더라도 착하게 살았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천국이 있으니 당연히 좋은 거고...
이거 분명 아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에 관한 책이 여길 채우고도 남아. 33년 후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이제 재림하십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시기 바래
여러분은 영원을 어디서 보내고 싶습니까?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 갈 준비해야 합니다. 계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천국 갈 준비는 바로 이러기 전까지 다 해 놔야 합니다.
그럼 천국 갈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겁니다. 이게 쉬울 것 같지만 절대 쉽지 않아요. 그러기에 우리가 살았을 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것 그게 영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할렐루야. 이 믿음 갖고 축복되게 살아가는 거에요. 우리는.
 
두 번째로 사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겁니다.
11절b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 인생에게는 한계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이 부분들을 잘 측량하고, 판단하고 분별할 수가 없어. 근데도 뭘 좀 들었다고 ‘다 그렇고 그런거야~’ 하는 분들 보면, 참 어리석어. 꼭 자기가 만지고 있는 부분을 코끼리의 전부로 알고 있는 것과 같아.
선을 행하라 하니깐,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달을 행복하려면 차를 사고, 일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지으라. 이런 걸 선을 행하는 걸로 알아.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란 책 있죠. 쳐다봐도 인사도 안하고, 뭘 그리 창피하게 시리 묻는 게 많은지, 게다가 집에 갑자기 가 보면, 뭐가 그리 엉망인지, 지나 잘하지 지집도 엉망이면서 남의 집 잘하라고 그러면서 쏘다니고... 그 꼴 보기 싫어 교회 가고 싶지 않대요.
근데 잘 보세요. 교회가기 싫은 이유 77가지 중에, 천국에 어떻게 가야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믿음은 어떻게 가져야 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그런 것 안 가르쳐줘서 안 간다. 그런 말 없어요. 죄다 외적인 겁니다. 누가 날 힘들게 했고, 누가 날 안 알아줬고, 누가 엉터리고... 다 인간적인 겁니다. 영적인 것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교회가 가기 싫죠. 교회 정말 가고 싶은 마음은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 바라보지 못하면 가질 수가 없어요. 억지로 하라고 그래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 저자는 다른 외적인 일에 시험에 들어서 삐쳐서 교회를 나가더니 다시 돌아와서 쓴 책이, 소금되어 만납시다. 이제 깨어났나 봐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12절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는 말씀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목적어가 하나님이고 ‘기뻐하며’는 ‘행복하며’란 뜻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며’는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깐 사람이 사는 동안 하나님이 행복하시도록 하나님께 선을 행해드리는 것이 최고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우리들 각자에게 많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걸로 하나님 기뻐하시게, 행복하시게, 하나님 영광 위해 활용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행복하게 해드리려면, 그 재능 갖고
무엇보다 기본적인 것을 잘해야 합니다. 아주 충실해야 합니다. 제가 부교역자 때에 한국에서 7년 동안 지휘 했다고 했죠. 대학부 때 지휘과 선배에게 비팅하는 법 배웠습니다. 매주 숙제가 거울보고 100번 연습하는 거였습니다. 열심히 해갔는데, 대뜸 ‘두부 써냐’ 그러더라고요.
한동안을 그렇게 연습을 하니깐, ‘좀 하네~’ 그러더라고요. 남은 어깨고 팔이고 아파죽겠는데..
신앙도 기본이 잘 잡혀야 합니다. 기도, 예배, 찬양, 말씀 읽고 하는데도 기본이 필요합니다.
기본이 잘 되면, 은혜가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시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시작됩니다. 기도해도 힘이 나고, 찬양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너무 좋고, 말씀을 보면 깨달아지는 것도 많고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고, 그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선을 행하는 겁니다. 우리 이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삽시다. 이게 축복된 삶의 비결입니다.
 
세 번째로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인줄 압시다.
11절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귀한 걸 다 주셨어요.
선물의 가치는 언제 가장 있냐면, 받는 사람이 그 가치를 알고 정말 고마워할 때입니다.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어느 날부터 느끼는 게 시계를 차고 다니더라고요. 핸드폰 보면 되는데 왜 저러냐 싶으면서도 은근히 갖고 싶더라고요. 근데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선물을 주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한지... 역시 선물의 가치는 내가 좋고 만족해할 때 최고로 큰 거더라고요.
예수님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시면서까지 믿는 자에게 구원의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믿아.
우리가 축복되게 살아가는 비결은요, 이 선물 받아들고 정말 기뻐하는 겁니다. 기쁘세요?
요셉은, 감옥서 10년이상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꿈 해석할 능력 있다 면서 바로 앞에 갔어요.
바로의 신하인 술맡은 관원이 요셉이 꿈을 잘 해석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의 기억력이 좋아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선물로 주신 겁니다. 요셉도 그걸 알았어요. 그 선물 받고, 애굽 총리가 되어 멋지게 하나님 일 이루어냈고, 그 가족들도 다 살렸어요.
욥, 폭삭 망했습니다. 친구들이라고 찾아와서는 뚜껑 있는대로 열리게 만들고, 염장 지르고... 근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날에 하나님께서 그 답답하고 상한 마음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요, 그 선물이 선물인 걸 깨달을 때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게 주신 선물 깨달아라
12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이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이게 선물이고, 그걸 하나님 주신 걸 알았다잖아요.
요셉, 욥,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 은혜의 선물을 받아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선물을 하나님 우리에게도 주고 계심을 분명히 아십시다. 이 축복의 출처를 아는 게 축복에요.
이제 이 선물을 받아든 우리가요, 이왕이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 삽시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보다 늘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더 복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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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7  희년이 주는 세 가지 정신 레25:10-21

안식일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 기념일입니다. 안식년은 매 칠년 째이고, 희년은 7번 안식년을 지난 다음 해로서 대속죄일인 7월10일 우리 역으로는 1월10일에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서 온 세상에 안식과 구원의 해인 희년이 왔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때는 잃은 기업이 회복되고, 종 되었던 자들도 자유를 누리게 되는 완전한 안식의 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안식일-안식년-희년이 주는 영적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청지기 정신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모든 것을 맡아서 주인의 뜻에 합당하도록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잘 하는 청지기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아서 자기 선을 잘 지킵니다. 우리가 이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 위치를 잘 몰라서 여기저기 마찰을 일으키는 것 같아 그래 우리가 이 부분을 잘하기 위해 알아야할 중요한 것은 23절 말씀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38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토지가 하나님 거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땅을 우리에게 주려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해서 옆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내가 소유하고 있다해도, 내가 주인이 아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시간도, 내 물질도, 심지어 내 자신도 내께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잠간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쯤에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 둬야할 청지기에 대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잠간 맡고 있는 청지기는 청지기인데 어떤 청지기냐 이거죠. 
오늘 말씀 보면, 가난하여 기업으로 받은 땅도 팔고, 자신도 팔아서 노예가 된 사람이 있어요. 반면에 그렇게 된 것을 돈을 주고 찾아다 줄 능력을 가진 그의 근족 또는 친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위치에 있냐는 겁니다. 무를 자입니까? 아님 무름을 받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입니까? 분명 아십시오. 무를 자입니다. 애걸복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냐? 18절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할. 26:3절 보세요.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12절까지, 쏟아부어주시는 은혜로 넘쳐나게 된다 했습니다.
그럼 규례를 행한다는 것이 뭡니까? 우리가 오늘 왜 이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편한 마음 갖고 오신 분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보니, 교회 나오는 것이 무슨 폭탄 떨어지는 전쟁터 같아요.그걸 뚫고 힘들게 온 분들도 있고요, 결국 못 나온 분들도 있어요. 마음에 다음 주에는 꼭 나올 상황이 되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그래도 안 돼서 가슴 치는 분들도 있고요,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오늘 오신 분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오신 분이나 못 오셔서 mp3로 이 설교듣는 분들도 다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합시다. 왜 승리해야 하냐면,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게 규례를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 다해, 정성 다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런 이에게 이 복이 주어진다고 하니, 당연히 우리는 축복의 청지기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복된 청지기로서 우리 손으로 다루어야할 하나님의 일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희년의 말씀대로 노예로 팔려간 가난한 친척을 데려와야 하고, 빼앗긴 가문의 땅도 되찾아 와야 하는데 지독한 사람을 만나면 그게 참 쉽질 않아요.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열심도 충성도, 순종도 다 해야 하고요, 어떤 때는 그렇게 하고도 안 돼서 엄청 지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축복의 청지기로서, 정말 귀중한 이 하나님의 말씀에 꽉 붙잡아야 합니다.
왜냐? 이게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그렇게 힘들어도 그게 하나님의 일에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많이 손해 볼 것 같아도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 해결해 주십니다. 이게 다 하나님 일이니깐요. 그리고 정말 귀하고 복된 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을 위한 선물을 지금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할. 새벽에 갑절의 축복 달라 하는데 주실 줄로 믿고 주님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청지기 정신입니다.

두 번째로 응답에 대한 신뢰 정신입니다.
18절 보세요.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7일 중 하루를 쉬는 안식일 쉬는 것도 정말 힘든데, 6년 일하고 한 해는 통째로 쉬래요. 일하지 말래요. ‘아니 주님 그럼 그동안 우리 뭐 먹고 살아요? 지금 우리 굶겨 죽이시려는 거에요?’ 이게 20절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21절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이걸 어떻게 주실까요? 이 부분 생각 좀 해 봅시다. 아마 이럴 수 있겠죠? 
❶ 3절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하나님께서 이 6년 동안 축복의 응답을 주셔. 26:4-5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풍족하게 주셔서 매해 저축하게 하시고, 묵은 곡식 어떻게 빨리 해결 해 봐라~ 가래떡 해먹을까, 박상 튀겨 먹을까~ 얼마나 행복한 고민에요? 좀 이래봤음 좋겠어. 우리 이런 저축하는 축복, 남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❷ 21절 대로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3년치 대 풍년이 일어납니다. 아니 고작 1년치 열매도 간신히 맺는 땅에서 갑자기 3배를 낸다고? 무슨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돼?
그래서 이 안식년의 의미 중에 하나는 “철저히,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공급해 주심을 하나부터 백까지 굳건하게 믿으십시오. 이 모든 일 하나님이 하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6일째 되던 날에는 더불로 주셨습니다. 5병이어로 5천명을 예수님께서 먹이셨습니다. 왕하6-7장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 때에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공격해서 포위하니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비둘기 똥 한 그릇에 50불이 될 정도였습니다. 왕이 그때 엘리사를 저주하니깐 엘리사가 하는 말이 내일 이 맘 때에 사마리아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통에 10불이 될 거다. 했을 때, 왕의 한 장관이 왕하7:19b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결국 이 장관은 백성들에게 깔려 죽어버려요.
여러분, 그냥 믿으세요. 이 하늘에서 창을 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1년치 곡식도 간신히 내는 땅에서라도 3년치 내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5병이어 기적도 내십니다.
믿음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우리 생각대로, 계산대로, 계획한대로만 된다면 그기서 더 이상 믿음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려서 망했지, 안식년, 희년 때에 하나님 말씀대로 놀고먹다가 망했다는 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기도의 자리에 서십시오. 갑절의 축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세 번째로 누림 정신입니다.
이왕지사 하나님을 신뢰하시겠다면, 그 말씀 믿고 좀 여유를 가지세요. 그냥 주실까~ 안 주실까~ 하면서 안달 부달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자기가 먼저 움직여. 그래놓고 믿음으로 했대.
하여간 성질 급한 분이 먼저 하는 거에요. 사울왕,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요. 사무엘은 안 오죠? 약속한 날은 지났죠? 그러니 성질 급한 놈이 꼭 나서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도 칼 들고 나서서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죠. 유다는 더해. 예수님이 안 하시니깐, 자기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그러면 하실 줄 알고, 은 30개에 예수님을 팔아버려. 그래놓고 믿음대로 되었다고 해요. 아니에요. 그건 믿음대로 된 게 아닙니다. 자기가 나서서 한 것이지.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손수 해 주실 은혜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그 선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지긋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애써는 사람들 많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이 주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 결과를 말씀으로 은혜로, 기적으로,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걸 받아서 누리는 날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그 약속의 말씀을 받아 누리는 날입니다. 누리기 위해 왔어. 
곧 Thankgiving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 아무 것도 안하고 쇼파에 딱 누워서 TV 채널 이리저리 돌리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나가서 식구들이랑 외식도 좀 하고... 그러고 싶죠?
그럴 권리가 있어요. 정당하게 일하고 휴식을 맘껏 누리는 겁니다. 
주일은, 안식일, 안식년과 희년은 주님 은혜를 누리는 날입니다. 억지로 의무감으로 나오는 날이 아닙니다. 기대에 차서, 주신 은혜를 셀라보고, 감사하고, 주님 만나서 기뻐하는 날입니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오는 날 주일이 아닙니다. 만약 의무적인 날로 와서 앉아 있다면 우리는 주일의 짐에 눌려 있는 겁니다. 마냥 피곤하고 힘들고 지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의 열매를 거두는 날이고, 은혜의 풍성함을 깊이 누리는 날입니다. 
그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하는 대로 갑절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 신나하는 여러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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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 하나님 마음에 합할 세 가지 비결 삼상17:41-50
 
삼상17:4-7을 보면, 골리앗의 신체적 특징이 나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에요. 대장군에요.
그런 골리앗이 하는 말이, 10절에서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근데 놀라운 것은 11절에 서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그랬고, 24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여...”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일 동안을 이러고 지낸 겁니다.
근데 다윗은 그 말을 듣자마자 26절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본 겁니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30일 동안이나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꼼짝도 못했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화를 냈냔 말입니다.
그기엔 사울을 비롯해서, 요나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들 얼마나 용맹한 장군들입니까?
누군 보고 누군 못보고 왜 그런지를 알아보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신앙을 생각해 보길...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첫째 비결은 하나님을 보는 신앙을 소유하는 겁니다.
먼저 우리는 그들이 선뜻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였을까요?
간단합니다. 골리앗과 자신을 비교해 봤기 때문입니다. 2미터 장신에다가 힘은 장사요, 이게 잽이 안 된다. 상대가 도저히 안 된다는 것 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겁니다. 그의 형 엘리압이 다윗을 말렸던 이유도 똑같아. 골리앗과 다윗을 직접 대조해 보니깐, 다윗이 형편없죠. 그러니 형이 보기에는 능력도 안 되는 것이 입만 살아가지고, 상금에만 눈이 어두워진 걸로 보여
그럼 다윗은 어떻게 달리 봤냐? 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철저하게 골리앗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본 거에요
그에 비해 사람들은 자신보다 휠씬 강한 골리앗을 보았고, 엘리압도 골리앗에 비하면 형편없는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보다 더 큰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굉장한 것.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여러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 하나님이 내 편이십니다. 할
여러분, 나보다 더 잘 되는 사람, 잘 하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들하고 나를 대조한다든지, 비교한다든지, 견주어본다든지,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그건 다 쓸모없는 일들입니다.
그 사람하고 내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 경쟁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 일을 어떻게 다루어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삼상17:47 앞에서 읽었죠. 모든 전쟁은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조건, 뭐 그런 것 보지 마시고, 그 사람을 직접 하나님께서 어떻게 상대해 주실 것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거보고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될 비결은,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왕이 왜~ 골리앗의 소리에 계속 침묵하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삼상9:2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골리앗 못지 않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11장에 보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의 우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분노가 일어나서 암몬족속을 쳐서 야베스 족속을 구해낸 용사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근데 지금 무엇하고 있어요? 왜 침묵하고 있어요? 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하나님이 더 이상 함께 안 하세요. 그러니 골리앗이 하는 말을 깨닫지도 못하고, 분내지도 않고 30일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던 겁니다.
신앙 성장이 멈추어버린 거에요. 삼상15장까지로 신앙의 도전도 성장도 끝나버린 겁니다.
그건 정말 주님이 원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주님은 뭘 원하시냐?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6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런 일들을 여러 번 겪다 보니깐, 하나님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다루는 기술이 점점 늘어나게 되어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 싸움 실력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신앙의 성장을 말합니다. 그러니 골리앗이 하는 말의 뜻을 다윗이 대번에 알아들었잖아요?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할례 없는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면서 지금 하나님께 싸움을 걸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 핵심을 딱 짚어내는 신앙의 실력, 성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 우리는 사울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좌정하여 계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시면서, 인도하시는 사람에요.
그러니 우린 날마다 주 안에서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자꾸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나가는데 있어 성장해 나가고, 진일보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작심하고 주님께 우리 귀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영어 잘 하는 법, 잘 알죠? 자꾸 보고 외우고 실습해보고... 시간을 투자한 만큼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기위해서도 마찬가지. 자꾸 외우고, 접하고, 자꾸 배우는 자리에 앉고 서고...
결코 멈추어선 안 됩니다. 신앙의 성장도, 성장을 위한 도전도 멈춰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가을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꾸 기도하는 자리에 서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통독성경90일 1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꾸 말씀을 읽고 듣는 자리에 서라~
우리가 뉴시티커리큘럼 주일학교를 온 교회가 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자리에 서라는 겁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우리 마음을 투자해서 어느 때든 주님 우릴 사용하시려고 하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딱 준비해서 있어서, 다윗처럼 골리앗 앞에 딱 나서게 되고,
어느 때든 하나님 우리를 축복하려고 하실 때에, 우리가 욥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립니다. 그 뜻이 분명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고난,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견디고 이겨내니, 주님 말씀하시잖아요? 너 꼭 정금 같다. 더 귀한 말씀, 갑절의 축복을 주겠다. 그건 영적 성장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이 은혜 가운데, 굳건하게 서게 되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비결은 하나님 위한 일에 생명을 거는 겁니다.
어떻게 하다보면 뭔가가 되겠지? 아무리 비교를 해봐도 정말 아닌 것은 아닌 건데, 누가 봐도 그런 골리앗 앞에 서는 건 정말 뭔가 있지 않고는 안 되는 건데. 그 뭔가가 아니고는 안되죠.
뭐 이럴 수는 있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 어떤 사람이 멋지게 다이빙했는데, 다 구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구경꾼들을 향해 화가 난 목소리로 그랬다죠? 누가 내 등 밀었냐고. 누가 밀지 않고는 죽음을 담보로 용기를 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48절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싸움이 시작되어버렸습니다. 그 전이라면 내가 실수였다고 말을 변경하고, 좀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면 되지만, 이미 good time이 지나버렸습니다.
이제는 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생명 거는 일 밖에 안 남았어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이미 영적 전쟁은 시작되었고, 돌이킬 수도 없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대신해서 싸워주실 줄로 믿고 담대히 나서는 수밖에 다른 길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이 형편을 여러분 분명히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에서야 ‘우리 교회 좀 그렇다’ 하면서 나가도 이젠 반겨줄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건 사도바울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돌아가 봤자, 믿어주지도 않아요.
그러니 사울이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다윗은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내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싸움입니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를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9) 이 일만 기대하면 되는 겁니다. 이 일은 하나님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 걸고 기도하자. 갑절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 주실 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워주시고,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이번 가을 특새의 주제처럼, 갑절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생명 걸고 기도합시다.
주님이 해 주세요. 예수님,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담대케 해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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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3 가나안 여인의 세 가지 기도 마15:21-28
 
우리가 보통 기도라고 할 때,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말 그대로 기도입니다. 내 뜻을 주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27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다음에 간구라 하는데, 나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리고 대화입니다. 내 삶을 여쭙는 겁니다. 어디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듣기도하고 말하기도 하고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기도의 세 가지 유형을 볼 것입니다.
 
먼저 이 여인의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간구)
두로와 시돈지역은 국경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근데 그기까지 쫓아올 정도면, 정말 절박한 일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 여인의 몸으로 ‘그 지경을 나와서’ 예수님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22절 보면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서 ‘흉악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나쁜’, 육체적인 의미에서 ‘유해한 위험한 병이 든’이란 뜻입니다. 귀신들림으로 인해서 육체적 질병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나쁜 행실이 자꾸만 나오는 거에요.
분명히 많은 병원에 가봤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스트레스로 인해 장애, 스트레스성 질병 이런 것 없었습니다. 무조건 정신병, 미친병 그러면서, 뇌 속에 병이 있다고, 톱이나 못으로 머리를 썰기도 하고, 나가라고 구멍을 뚫기도 하고, 얼토당토않은 민간요법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진료비는 또 얼마나 비싼지... 경제적으로도 감당이 안 될 뿐 아니라, 나쁜 행실을 하러 다니는 딸을 잡아다니는데도 정말 지쳤을 것입니다. 너무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깐 국경너머서 아무도 못 따라오는 곳까지 예수님을 쫓아와서는, “소리 질러 이르되.” crying out 울부짓되. 그렇게 힘드니깐 울부짖는 겁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요. 아기들이 쉬~하고 찝찝하니깐 갈아달라고 울잖아요?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깐. 젖먹던 힘낸다 하죠. 근데요,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얼마나 냉정하신지...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아~ 정말 예수님이 맞으신 거에요? 예수님이 이방 페니키아(보니게) 지역으로 오셨다고 마음도 이방스럽게 변화되어버리신 건 아닌가 싶어요.
더군다나 23절b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님 돌봐주실 때까지 계속 소리치며 따라오니깐 제자들이 너무 성가셔서 ‘아~ 예수님 어떻게 좀 해결해 주세요~’ 하는데, 그기서도 직격탄을 날려 버리신 겁니다.
그럴 때 있죠?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정말로 답답하고 또 답답할 때가, 너무 힘들어서 주께 기도했는데, 전혀 응답이 없다가, 그나마 응답이라고 왔는데, 난리가 난 거에요. 그럴 때 있죠. 정말 ‘악~’ 소리밖에 낼 수 없는 상황이 오는 때 있죠?
여러분들 이런 상황 맞이해 보셨습니까? 그럴 때 어떻하셨어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두 번째로 그때 이 여인은 예수님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간구)
모든 기대가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 말은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겨줄 마음 없다. 끝장나 버렸잖아요?
여러분이면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예수님이고 뭐고 소용없다.’ 하면서 박차고 뛰어나가겠습니까? 어떤 사람이요, 이렇게 기도했는데, 응답받지 못한 후로 평생을 한 번도 교회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아.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떠나고 싶어세요?
아뇨. 그건 성경적이지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오늘 가장 좋은 방법 찾아야 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말은 물에 빠져 급하게 소리치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열일 다 제쳐두고 황급히 달려와서 구명의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그런 뜻입니다. 간구해야 해요.
아무리 주님 응답도 대답도 없다 해도, 우린 멈춰선 안 됩니다. 열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처럼, 주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주께 가까이 다가서야 합니다. 중풍든 친구를 침상 채 들고 지붕에 올라가서, 정말 무례하죠~ 자기들만 생각하는 극단의 이기주의의 행동이란 소릴 들을 수 있어요. 그래도 그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친구를 데려다 놔야 합니다.
그게 간구에요. 그래야 다음이 있어요. 그래야 길이 열립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요즘 누가 그런 식으로 해요? 누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합니까? 교인들이 그래서 욕을 먹는 거에요. 백말을 하면서 말리더라도, 우리의 주님을 향해 가는 걸음이 멈추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계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절대 멈춰선 안 됩니다. 은혜 받는 자리,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요. 굳게 잡으세요. 절대 뺏겨선 안돼. 그래야 Next가 있어요. 그럼 이 여인이 듣게 되는 Next는 뭐였습니까?
26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습니까? 기껏 자존심 다 내려놓고 붙들었더니만, 정말 곤란한 말이나 듣고요. 이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답답해서, 하나님 말고 사람 있으면 와서 좀 도와 달라고. 하나님 정말 안 통한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런데요, 불통도 그런 불통이 없어도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요. 말씀은 차분히 받아야 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뺏기지 말아야 해.
흥분하면요, 하나님 말씀의 진짜 의미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지금 ‘개’란 말에 흥분했잖아요? 차분히 들여다보면, 개도 개 나름이죠. 여기서 ‘개’는 집에서 기르는 작은 애완용 개, 푸들 같은 거에요. 요즘 제주도의 거리를 다닌다는 들개가 아닙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말투부터 달라져 있잖아요? 엄청 누그러져 있어요. 보통 대화에서 그렇게 상대가 누그러진다는 것은 뭔가 여지가 있는 거죠.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선대해주시려는 주님을 만나는 Next가 열리는 거에요. 그걸 놓치면 안 돼.
 
그래 세 번째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습니까? 예. 맞아요. 예수님께서 이방여인이지만, 이 여인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깐 예수님 말씀의 어투가 정말 눈에 띄게 수그러진 것이고, 사랑이 뚝뚝뚝 떨어지는 그 은혜의 눈길로 봐 주신 겁니다. 이 여인도요, 그 은혜 안에 반드시 있으려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걸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봐야 하는 겁니다.
이 여인의 장점은 그 냉정하고, 차가운 대화 중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인줄 알고 오직 예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대화하며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은혜의 자리에 선 겁니다.
예. 저도 개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 받아먹습니다. 제게도 주세요. 귀한 믿음이야.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장점은 뭘까요? 끝까지 주님 세워주신 이 교회에 주님의 마음이 있음을 믿고 견디어낸 것입니다. 이 여인처럼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비전을 주실 때까지 이겨낼 힘과 용기를 달라 기도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우리의 장점이요 희망이야
 
결론, 그런 우리에게 이 여인에게 예수님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했습니다.
여인의 소원은 딸이 낫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야베스가요, 기도하니깐, 하나님 응답을 주시겠대요. 그걸 안 야베스가 하나님께 한 간구가 대상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렇다면 은혜 받기 원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는요? 바로 이번 특새의 주제입니다. “갑절의 축복을 주소서.”
욥이 기도했죠. 1:21b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 기도 들으신 하나님께서 욥을 연단하시고 훈련하셔서, 정금같이 되게 하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셨듯이, 우리 교회에도 갑절의 축복을, 우리 가정에도 갑절의 축복을, 우리 유스에도 갑절의 축복을, 우리 인생에도 갑절의 축복을 주옵소서. 들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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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6  simple 하게 믿읍시다  잠30:1-9

국민일보 겨자씨(2013.6.2.일자)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자나 호랑이를 길들이는 맹수훈련 전문자들, 조련사라 하죠. 이들이 꼭 사용하는 도구가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지입니다. 조련사가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의 얼굴에 들이대면 사자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한답니다. 
왜 그런가? 사자는 의자의 네 다리에 동시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한꺼번에 여러 곳에 신경을 쓰다보면 일종의 마취작용을 일으켜 정신이 혼미해지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들어 조련사의 명령에 고분고분 순종하게 된답니다.
사탄이 우리 인간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방법도 바로 이 관심의 분화입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시켜서 어느 것 하나에도 충실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사탄은 인간을 ‘대충, 적당히, 나중에, 이번만’이라는 네 다리를 가진 의자로 파멸시키려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잘하려면, 한 가지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귀중한 예로. 주일 성수 하나만 제대로 해보세요. 기본적인 삶의 틀이 잡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단순해야 합니다. 복잡하면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이 단순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럼 신앙생활 잘하려는 우리들, 오늘 주신 말씀 통해 단순함의 신앙을 그려보십시다.

먼저 신앙생활 잘하려면 주 안에 있는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굴의 기도’입니다. 이 아굴이 누구냐에 대해선 보통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디엘과 우갈도 보통은 사람의 이름으로 봅니다. 
근데 이 말을 동사로 보면, ‘내가 지쳤나이다 하나님, 내가 지쳤습니다. 하나님, 나의 온 힘이 다 소진되어버렸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기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굴이 솔로몬이라는 생각이 더 굳어지죠?
전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나이다. 그 말이죠? 이게 ‘아굴 기도’와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나사로’가 나옵니다. 부자는 살아서 부자였고, 나사로는 홈리스피풀인데, 특히 자기 집 문간에 앉아서 빌어먹으며 사는 정말 하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어서 지옥에서 고통 중에 보니깐,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있거든요. 눅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직도 자기가 부자고 나사로는 거지인 줄 알아. 말 한 마디면 자기를 위해 다 알아서 해주리라 착각하고 있어. 아니잖아요?
그걸 모르고 자기가 할 말만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 말만 하다보니깐, 아브라함과 나사로가 하는, 자기가에게 꼭 필요한 말인데 그걸 못 들어요.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을 듣지를 못했어요. 그러니 자신이 이 천국과 지옥에서 자기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를 몰라요.
더 비참한 건. 이 땅에서는 기회가 있는데,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할 진실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할 우리 마지막 말은 2절a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그만큼 비참한 처지에 빠져버린다는 말입니다. 짐승과 같음을 내가 깨닫는 것 하고, 남이 지적해 줘서 아는 것은 정말 달라. 특히 예수님께서 ‘니가 짐승이다~’ 말해주는 상황은요, 정말 끝장난 상황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지와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만이 도우심 인줄 알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하고, 끝까지 짐승 같은 짓만 하다가 끝나는 것하고는 정말 다른 거에요.
부자가 나중에 이걸 깨달았습니다. 27-28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 삶이 헛 것인 것을 좀 빨리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습니까? 
솔로몬 같은 사람도 지금껏 애써왔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더라고 했는데, 우리가 해 왔던 신앙생활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온 삶이라고, 헛되지 않으리라고 자신하십니까?
지쳤습니다. 내 몸의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괜찮았을 텐데 함께 하지 않으셔서 이래 된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우리는 하나님 뜻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주일 한 번 나온 걸 최선이라 생각하고, 십일조에 주일헌금 드리는 일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기도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열심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성도의 외침이 메말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쓸쓸히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과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하고 있습니까? 이게 내 일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일만의 소로 된 번제를 받고자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고, 우리의 심장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기서 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도 없기니와...”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니 뭘 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도 없으니,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모르는 척해도 괜찮지 않냐? 아니 꼭 그래야 되겠습니까?
아뇨. 주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안다면, 이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믿음을 가지고 불 속에라도 물속에라도 오라 하시면 주를 위해 죽으러 가자~ 뛰어드는 심장, 그 마음을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겁니다. 
심장이 오장육부 중에 가장 중요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듯 하나님을 우리 심장처럼 최우선으로, 최고로 여기는 우리 마음, 그 마음을 받아야겠다. 그거 달라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두번째로 주 안에 있는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최고 신앙이 있습니다. 
아굴의 기도는 두 가지. 7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얼마나 멋집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군가를 아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복된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멋진 신앙생활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다하자
그 첫째가 8절a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5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라.” 우리의 아쉬움은 사실을 너무 모르는데 있어요. 하나님 말씀도 마음도 너무 몰라요. 왜 그렇게 되었냐
아니,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가 13년입니다. 이게 기본 교육이잖아요? 13년을 받았어. 근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단 4주의 새신자 교육, 몇 시간의 세례교육, 약간의 보충 교육으로 퉁~ 치려고 하고 있어요. 13년간 step by step 정말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근데 한번도 하나님께 대해, 교회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자리에 서 보지 않은 분도 있어.
그럼 어떤 결과가 있냐?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천국 갔을까요? 못 갔을까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니 기독교는 너무 독설적, 배타적이지 않냐? 교회가 너무 자기만 안다.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니...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신앙을 가리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대신에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십시오. 훈련받으시고, 배우세요. 철저하게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시고, 오직 우리의 목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 확실히 믿으십니다.할.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할 할 할
이 말씀에 귀가 번쩍 띄고, 아멘이 저절로 나오는 분들 멋져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
이 최고의 신앙으로 무장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요, 8절b~9절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서론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한 가지 일에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만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된다 이겁니다. 그게 신앙생활 잘하는 건데요, 8-9절이 그겁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 나라만, 하나님의 의만 나타내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나타내고 영광 돌리면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그렇게 하나님께만 매달려 사는 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치고 힘든 이 세상 살아가면서 좋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고, 좋은 교회를 좋은 신앙 가지고, 좋은 섬김을 하면서 다니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도 좋은 성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 섬기고,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로 이 교회로 이끄셨고, 가난하든 부하든 죽도록 충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상황을 또한 너무나 잘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거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나라와 의만 구한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가 되어 주시니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만 위해서만 산다.
그렇게 삽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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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9 common sence 신앙 시91:1-16
 
우리가 보통 쓰는 상식(常識) 말은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상식이 풍부하다’와 ‘상식이 통한다’. 이게 의미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전자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아는 지식’을 뜻하고,후자는 ‘인간이 지녀야할 건전하고도 보편적인 판단력’을 말합니다.
뜻은 다르지만, 상호연관관계가 있습니다. 많이 아는 만큼 인간이 지녀야할 건전한 판단을 많이 하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게 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 면에서 상식이란 ‘사람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불문율’입니다. 그냥 물 흐르듯 순리에 따르는 모든 것을 말해요. 또한 지키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아요. 그러나 모두가 공감하는 것.
자, 하나님께서도 바라시는 바가 이 ‘물 흐르듯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삶’입니다.
알아야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아는 만큼 말씀을 우리 삶에 잘 적용시켜나가는데 있어 전혀 색다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 내게 가장 잘 맞고, 잘 어울리는 옷이라 할까? 신앙의 옷?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한다는 건 바로 가장 잘 어울리는 신앙의 상식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꼭 알아야할 신앙의 기본, 신앙의 Common Sense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의 Common Sense를 가져야 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나와. 지존자, 전능자, 여호와, 피난처, 요새, 의뢰하는 이,
우리를 은밀한 곳에 숨기는 지존자이고,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게 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저희 어머니가 2007년에 소천하셨는데, 장례를 치루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느낀 게요, 뭔 일이 든 얘기할 사람이 없어졌더라고요. 뭐 좀 힘든 일이 생기면 전화를 했었어요. 그럼 제 목소리 듣고 딱 알아차려요. ‘뭔 일 있냐~’ 물어보지 않고 ‘애를 안 굶기고 잘 보살피고 있지?’ 그 말 한 마디 만으로도 마음이 참 편했었습니다. 그걸 그땐 잘 몰랐었습니다. 천국 가고 나니깐 알겠더라고요. 참~ 효도는 살아계실 때 잘하는 건데... 청개구리때도 아니고... 물론 가끔 엄친아 얘기를 해서 속 다 뒤집어 놓긴 했지만.
사람이 말에요. 위기가 왔을 때 본능적으로 ‘의지할 곳이’라 생각이 되고, 본능적으로 내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돌아다보는 곳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곳입니다.
여러분에겐 위기 왔을 때 본능적으로 돌아보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겨지는 곳이 어딥니까?
좀 못나도, 어머니는 정말 잘난 아들로 생각해 주셨어요. 어떤 얘기라도 다 들어주셨고요.
지금 제 옆에는 어머니 대신 와이프가 있죠. 늘 같은 편입니다. 좋은 얘기 많이 해 주는데, 어떤 때는 왠지 분명히 잘 되자는 말인데도 기분이 묘해지는 때가 있죠? 그래서 어쩌면 더 어머니가 보고 싶은지 몰라요. 늘 내편이고 그래서 의지할 곳이고, 가장 안전하다 생각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모님들 데려가시는 것 같애.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지 못함을 알아라
정말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안전한 날개 아래로 피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 믿고 의지해야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게 절대적인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제부터 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할 Common Sense는 ‘하나님은 정말 확실하세요.’
3-4절에 중요한 동사가 3개 나옵니다. 3절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절에서 “덮으시리니.” “되시나니.” 이 세 단어는 각각 그 뜻은 다르지만,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건져주실 것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덮어주실 것이다~ 그 말인 거죠.
하나님은요, 우리가 가장 위험한 순간에 100% 1000% 믿고 의지해도 되는 분입니다. 할.
그건 정말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꾸준히 보호해줄 장소를 제공해주시고, 우리가 피할 자리도 마련해 주겠다고 하시잖습니까? 그게 진짭니다.
룻기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어요. 이방여인입니다. 속된 말로 하자면, 남편, 시아버지 잡아먹은 년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어요.
그때 보아스가 하는 말이 룻2:12에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게 보아스가 한 말입니다. 롯이 뭘 어떻게 해 달라 한 게 아네요. 하나님께서 보아스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받으러 온 사람’임을 알게 하셨고, 선의를 베풀게 해 주신 겁니다. 이게 룻에게 임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 지역 모든 사람들도 룻에게 어떻게든 위로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고 덮어주려 하잖아요?
룻을 건져주셨던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여러분들을 그 날개로 덮어주시고 계십니다.
정말 우리 마음의 여러 의심과 걱정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되어주심을 신뢰해야 해.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5-6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정말 하나님이 참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으세요. 하나님이 확실히 우리 도와주실 것 믿으세요.
어떤 환난과 위기를 당할지라도요, 여러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래지지난 주에 우리 빌라델비아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나누면서, 계3:12a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지금껏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는 얘기에요. 왜 나갔다고 했습니까? 지진이 너무 많이 일어나. 두려워서 잠을 못자요. 언제 저 지붕이 무너져서 깔려죽을지... 또 이번에 피난가면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지내야 할까~ 모든 게 근심입니다. 근심.
근데 예수님을 말씀하세요. “기둥이 되게 하리니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지진이 앞으로는 없게 될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만 그것보다, 지진이 와서 7절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그 말씀 믿고 담대해져서, 도망갈 궁리하는 것보다는 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 붙드심이 있을 줄 확실히 믿고 두손두발 걷어부치고 복구하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러니 기둥이 되는 거야.
우리요, 이왕이면 주의 성전에 기둥같이 쓰임받는 믿음의 성도가 되십시다. common sense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가? 주시겠다 하시는가?
9절 말씀에 그 답이 나옵니다. 이게, 우리 성도가 주 안에서 새 힘 얻고 승리하는 길입니다. 보세요.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그러니깐 ‘아 니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십니다. 그러니 피난처가 되어 주십시오.’고 기도하지 않았냐? 하나님을 너의 거처로 삼겠다고 기도하지 않았냐. 예.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우리가요, 하나님의 마음을 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다 주실 준비 끝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질 Common sense 신앙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있어요.
14절a “그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나 사랑해봐 다 건져줄게~ 들리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을 이미 보여주셨어요 물에서든 불에서든 다 건져줄테니깐. 그러니 우리도 한 번 보여 봐라 하신 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뭐 특별난 것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오, 요새시오, 피난처시오,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철썩 같이 믿고 의지하는 거에요. 그래서 따르는 것에요.
계속해서 14절 b “그가 내 이름을 안 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좀 알아 달라는 겁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이야, 피난처요 요새가 되는 하나님이야. 지존자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야.’ 하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104: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모래를 못 넘어. 어쩌다 쿨럭이면서 가끔 넘치기는 하지만, 보통은 거기까지만 몰려와. 그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산더미 같은 파도가 와도, 하나님 정하신 경계를 넘지 못함을 믿고 그기 딱 서 있어 보세요. 대단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될 겁니다. 할.
그리고 15절a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좀 부탁하라는 요구입니다.
지금 옆에서 천명이 죽어나가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께 물어야죠? 우리도 도망가야 하나요? 아니면 약 먹고 버틸까요? 근데 묻지도 않고, 약 먹는 것은 불신앙일 것 같고, 도망가는 것은 믿음이 약한 것 같아서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어. 왜 그러고 있냐 하나님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 기도해야지. 왜 니가 고민하고 니가 근심하면서 해결하려고 해. 그럼 해결이 안 돼.
물어봐야 합니다. 구하라 그럼 줄게. 두드려봐~ 열어줄테니깐. 찾아봐. 눈에 다 띄게 해 준다니깐. 구하는 것마다 찾는 것 마다 다 줄게.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리 말씀하시겠습니까?
구해야할 때 구하는 게 그게 신앙의 기본에요. Common Sense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압시다. 신앙의 Common Sense를 가집시다. 기본적인 신앙을 아십시다. 15b~16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기본적인 신앙을 가질 때 기본적으로 딸려오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받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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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2 신앙 점검 해 봅시다 삿2:1-5
 
사우스이스턴신학대 척 래러스 교수가 교회에 ‘못된’ 성도가 있는 8가지이유 를 말했습니다.
1. 모든 교인들도 결국 사람이어서, 구원받은 사람들, 회심한 사람들도 민감한 상황이 닥치면 죄인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키면서 못된 짓 다하고 다녀.
2. 어떤 성도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중에도 믿지 않은 한 명의 제자가 있었잖아요? 당연히 교회에도 아직 예수 못 믿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하면서 아직 믿음의 확신이 없는 분들을 그냥 내버려 둬. 언젠가는 변화되겠지 하면서. 근데 X
3.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직 훈련되지 않았다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데는 열심인데 반해, 바르게 훈련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쏟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교회에는 늙은 아기와 같은 성도들이 많아져. 거기서 우유 안 준다, 기저기 안갈아준다는 불평과 불만이 나오면서 습관화
4. 혼자서 막중한 부담을 떠안고 있는 성도가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짐과 고통에 집중하다보니, 타인의 어려움에 무심할 수가 있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성도, 아픈 성도, 가정의 문제로 힘든 성도가 주변에 많이 있는데... 게다가 너무 많은 교회 일을 떠안고 있는 성실한 성도들도 있어요. 착하다고 자기 일까지 다 떠넘겨 버려. 그러다 인생 문제도, 교회 일에도 너무 짓눌리다, 인격과 언행이 과격해질 수 있어. 노는 이도 못된 성도가 되는 거에요.
5. 너무 빨리 힘과 영향력이 주어진 사람도 있다 교회가 사람이 늘 부족하다보니 아직 성숙하지 못한 분에게 어떤 일을 맡길 때가 있죠. 그러다보니 자칫 세상에서 하던 방법대로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내세울 수가 있어. 참 잘 이끌어줘야 합니다. 그 시기 놓치면 굳어져버려요.
6. 끊임없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자꾸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었으면서 아직 그런 것도 못해?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래 믿은 저 사람도 아직 저러고 있는데, 몇 년 안된 나야 죄 지을 수 있지~~ 자기 죄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는 거죠. 아예 잊어버리게 되기도 하고. 자꾸 남을 정죄하는 사람으로 되어져 간대요.
7. 분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멀쩡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듯 돌변해버리는 분노조절장애 가진 분들. 이런 분들은 사과도 빨리하고 회개도 잘해요. 뒤끝이 없다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 시키면서, 좌충우돌 성도들 사이를 누비고 다녀. 점점 심해져가.
8. 교회가 그들을 방치하기도 한다 성도 한 명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 문제가 보여도 모른 체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건 그들로 죄악속에서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이런 갈등회피는 기독교적이지 않아요. 방치하는 행위도 못되고 나쁜 성도의 행위고요,그래도 되는 줄 알고 못된 교인 되어가는 것도 나쁜 행위입니다.
자, 이런 이유로 인해 못된 성도, 못되어져 가는, 주님 마음 아프게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좀 솔직하게 우리들 자신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신앙점검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내용입니다.
1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자 여기서 보세요. 오늘 제일 먼저 생각해봐야할 부분입니다. 이 신앙을 주기도하고 점검하기도 하시는 분이 누구냐입니다.
이 포인트 놓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주어는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구약에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에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고, 점검도 하십니다. 보세요. 1절에서 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셨고 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들어가게 하셨고  약속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게 적용하면, ❶ 우리로 예수를 내 구주로 믿게 해 주셨습니다. ❷ 믿는 우리로 교회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❸ 영원한 생명을 믿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 하나님께서.

그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점검해 본 결과가 어땠습니까?
2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점에 서 있는 거에요.  이 땅 주민들과 언약을 맺어 버렸죠.  제단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둬 버렸죠.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지파별로 점령 못한 곳을 보면 그기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의 우상제단이 있는 곳이어서 아주 작정을 하고 악착같이 안 뺏기려고 버틴 곳이라는 거죠.
참 이해가 되긴 하는 말입니다만, 하나님 말씀에서 아닌 것은 반드시 아니어야 합니다.
그들이 악착같으면 우리는 막무가내로 덤벼들어야 합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입니다.
이걸 그냥 넘어가려하면, 앞서 언급한 못난 성도들. 아차하는 순간 우리가 될 수 있는 거에요 2번 교회 다닌 지 얼마 안됐으니 아직 예수를 확실하게 못 믿을 수도 있지 않겠냐~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스스로가 익스큐즈를 해 준겁니다. 그럴 수 있다고.
근데 그럼 안돼요. 아직 얼마 안 되었어도 다른 것은 몰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 예수를 확실하게 믿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때 제대로 안 해두었기에 교회 10년 20년을 다녀도 예수를 못 믿어요. 너무 어려워요. 이해가 안되요. 그래샀잖아요? 절대적으로 달라붙어서 결단을 내야 해. 답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또 3번 훈련되지 않았다. 5번 너무 빨리 힘과 영향력을 주었다. 교회가 사람이 없으니 뭐든 시키는데, 근데 본인도 아직 정리가 안 되었고, 교육받고 훈련된 부분도 없으니 어떻게 해요? 세상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하고, 그걸 또 그냥 내버려 둬요. 그러니 맞는 줄 알아요.
죽자사자 훈련받고, 교육받고, 주의 일에 충성하는 것 배워야 합니다. 정말 중요해요.
8번 교회가 방치해요. 주님 보시기에 아닌 것은 아니다. 사생결단내야 하는데, 성도 한 명 잃게 될까봐 그게 두려워서 제대로 말도 못해요. 그럼 제대로 신앙성장을 못해요.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릴 삼키려고 눈에 불 키고 덤비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걸 아시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데 있어서 뜨뜨미지근해선 안됩니다. 그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걸 제대로 안 하면요,
3절b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버리니 철저하게 순종으로 나가야 되는 겁니다. 1-5절의 시점은 여호수아가 죽기 전입니다. 그 말은 아직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뭐 당장 무슨 위협이 없으니깐, 좀 적절히 하자~ 그러면서 시간 다 보내고 나니깐, 어떤 일이 닥칩니까? 10절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래서 12절에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14절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어제 새벽에 이런 얘기 했습니다. 두 가지 마귀가 있다고. 기도 하지 않아도 잘된다는 마귀, 기도 적게 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우리 마음 다 아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마귀.
우리 정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점검 정말 철저하게 해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해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말씀을 맺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담 가이벨이란 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참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동료인 오스틴 마일즈를 찾아가 ‘매절마다 부드러운 감정이 깃들고, 소망을 잃은 자에게 소망을 주며, 고달픈 자에게는 쉼을 줄 수 있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침상에 누워있는 자에게는 부드러운 베개와 같은 찬송이 있었으면 좋겠네.’ 작사를 부탁했어요.
이 부탁을 받은 마일즈씨는 어느 날 요20장을 보면서, 마음이 확~ 열리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좋을 때, 행복할 때, 평안도 얻고, 강건할 때 그때가 언제일까~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텅 빈 무덤 밖에 서서 마리아가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근데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우리 그럴 때 있죠?
다시 예수님이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 제목 ‘Come to the garden alone.’ 나 혼자 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 동산에 주님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주셨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저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삶 한 가운데에서 늘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즐겨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편한 찬송을 주님께 부르면서 행복한 신앙의 삶을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우릴 너무 거칠게 신앙생활 시키고 있어. 그래서 힘들죠.
그래도 늘 우리 이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만 들으면서 감동과 안도의 편한 숨을 쉬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와 함께 하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감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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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5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계3:7-13

처음 미국에 들어올 때 제게 겁을 잔뜩 준 것이 있었습니다. ‘이민국 심사대’를 잘 통과해야 한다. 아차 대답을 잘 못하면 돌아가야 된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그래 심사대에서 이민국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면서 얼굴을 쳐다보니깐, 정말 심술궂고, 엄격하고, 인정사정 안 봐줄 것 같이 보이는데... 좌우간 어떻게 통과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이러겠구나.’ 생명책 맡은 천사가 내 이름을 확인할 때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우리가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내 구주시라고 시인함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할. 만약 천사가 고개를 돌리면 끝장이잖아요?
그런 일 벌어지지 않을 것 확실하게 확신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는 떨릴 것 같아요~
그래도 입국심사대 통과할 때나, 천국문에 설 때나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겁먹을 필요 없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교회에게 그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8절a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쉽게 말해서 주를 향한 우리 마음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났는지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천국문 활짝 열어 놨다. 어서 들어오너라~’ 하세요. 그럼 주님이 그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렇게 대문을 활짝 열어두셨는지를 보면서, 우리도 열린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임을 확신합시다.

먼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기 때문이라 했다.(8절)
여기서 ‘적은 능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빌라델비야교회의 성도수가 매우 작았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도시의 하층민들이었답니다. 
 8절b에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렇게 작고, 성도들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내 말 곧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느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그래되었다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생명 걸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려는 자리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하셨는데, 그 시대는 모든 생활이나 생업이 다 우상숭배하는 거에 맞춰져 있으니 성도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거기다가 세상 불편함 없이 살려면 적당히 거짓말도 해야 하고, 눈도 좀 감아줘야 하고, 일군들 악착같이 착취도 해야 하고, 내가 편히 살려면 남의 희생과 눈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 아니었습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죠. 근데 그걸 신앙인이기에, 신앙의 양심상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 한다 칩시다. 그럼 불신자들하고, 우리하고 다른 게 뭐가 있어요?
그게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요 배반하는 것이니 신앙 양심상 절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계약을 맺은 겁니다. 렘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언약의 내용이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 주시겠다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목소리 순종하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굳건하게 믿는 겁니다. 이 믿음대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철썩 같이 믿음의 약속을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셨죠. 5, 2, 1달란트를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맡기고 타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은 모게지 Loan해 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돈을 받는 순간부터 계약이 이뤄지면서 이자가 복리로 붙는 겁니다. 
근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계약을 거절했습니다.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선 온갖 오해를 다하면서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그건 주인의 뜻과 철저하게 반대되는 거죠. 그걸 불신앙이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말하잖아요? 은행에 맡겼으면 이자라도 받았을텐데 최소한의 수고도 하지 않을 정도로 주인인 나를 위해 하고 싶은 맘이 그렇게도 없더나, 그렇게도 싫더냐?
오늘 본문의 빌라델비아교인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적은 숫자였는데도 그기에 서로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 맡겨주신 달란트로 알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 때 천국 문 열린 겁니다.

두 번째로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10절) 했습니다.
그러니깐 ‘예수께서 우리 위해 인내해주셨다는 그 말씀의 내용을 지키려 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우리를 위한 참으심.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한 마디면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면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없게 되는 거죠. 그걸 알기에 십자가에서 숨이 넘어갈 때까지 예수님은 견디신 겁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걸 알기에 예수님의 인내해주신 본을 따라서 시험 당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스도를 배반치 않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 거였습니다. 요16:33b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 말씀 믿고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주님 가신 길 우리도 간다’ 그러면서 견뎌낸 겁니다.

다윗은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대단히 애썼습니다. 참고 안내하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그에 비해 솔로몬은 초기에 성전을 짓던 신앙, 나중에 다 날려 먹었잖아요? 
여러분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솔로몬에게는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연단 받은 것도, 훈련받은 것도 없어요. 그러니 인내할 줄을 모르고 자기 하고픈대로 다 했어.  
그럼 다윗왕과 사울왕의 차이는 뭔지 아십니까? 이것도 같습니다.
사울왕이 아말렉의 좋은 소, 양에 시선이 꽂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때까지 그걸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비슷한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다음 왕이 될거라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후 어떻게 했죠? 사무엘이 자기 갈 길로 가고, 다윗도 자기 길 가서 열심히 양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으니 하나님께서 왕도 되게 해 주실 것이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 겁니다. 사울은 그걸 참지 못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피를 내 손에 묻히지 않겠다. 하나님께 맡기겠다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빌라델비아교인들은 이 말씀을 붙잡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겁니다. 
그러니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야교회에게 계3:10a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할.
우리 유스가 벌써 300명 비전을 갖고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랬대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 겁니까?’ 솔직히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과연 될까? you 어때요?
근데 10년 전에 교회 개척할 때 하나님 주신 비전이 기드온 300명 용사였습니다. 단 두 가정으로 막 개척을 하는데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근데 작년에 반올림해서 200명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들다는 것 인정합니다. 저도 한숨 쉬면서 물었어요. 가능할까요? 애들을 말릴까요? 그래야 되겠죠? 주님 제게 요셉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야야 요셉이 약 4년을 노예 생활한 끝에 그 집 청지기가 되었어. 얼마나 힘들었겠어? 근데 더 힘든 것은 감옥에 가서 있었던 10년의 세월이었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오해가 풀릴 수 있을까? 여기서 이렇게 전전긍긍하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들어올 때 요셉이 힘들지 않았겠니? 
네가 지금 그 고민 하고 있는 거야. 신앙은 기다리는 거야. 내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 붙잡고 인내하면, 주님도 우릴 지켜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11절에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 12절 다시는 나가지 않게 하리라. 합치면 성전의 기둥이 되어서 다시는 나가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그림 빌라델비아 성 요한 교회의 터, 기둥들입니다. 여기 소아시아는 지진대에 속해있어서 A.D.17년에 큰 지진이 와서 도시가 그의 무너진 걸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시 재건하고 이름을 ‘네오 가이사랴’로 바꾸었고, 그후에 또 한번 일을 치루고 이름을 ‘플라비아’로 바꾼 곳입니다.
작은 지진도 수없이 많았죠. 그래서 지진이 올 때마다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나갔었습니다.
2천년의 그 긴 세월 동안 지진 뿐 아니라 수많은 세월의 변고로 인해, 교회를 이루던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근데 참~ 이 기둥은 남아 있잖아요? 주님 약속하신 대로 여기 그대로 있어서 다시는 나가지 않게 하리라. 눈물도 안타까움도 다 씻어주리라.
하나님 결코 우리 수고, 눈물 잊지 않으시고 주신 축복의 분량이 다 이루어지도록까지 우릴 만지시고 도우실 줄로 믿으십시오. 이제부터 다시 기드온 300용사, 참 오랜만에 쓰는 말에요300용사로 세워주신 줄 알고 다시 기도 시작하고, 훈련시작하고, 응답해주심을 기대하십시다. 
이 일은 주님이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힘도 우리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 지켜 주십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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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8 벧엘로 올라가라 창35:1-
 
야곱이 얍복강에서 형을 만나고 난 후 세겜으로 가서 10년이 살았습니다. 그 10년의 세겜생활의 결과가 나왔는데, 뭐 이거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습니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야곱의 하나 밖에 없는 딸 디나를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추장 아들은 ‘사랑한다. 방법은 틀렸지만 그래도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그러는데, 너무 황당한 일이라 뭐라 답을 주지 못하고, 들로 나간 아들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아들들이 화를 내면서 결국 큰일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세겜의 남자를 트릭을 써서 다 죽여 버린 겁니다. 전혀 잘못이 없는 사람들까지 말입니다. 큰 일 난 거에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에 야곱이 세겜으로 안 가고, 벧엘로 갔다면 어땠을까~
창31;3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 붙잡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전격적으로 떠나온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선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하냐?는 질문이 나오겠죠? 우리가요,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는 하나님 아 하시면 어~ 하고 척 알아요. 조상의 땅이라는 게 무슨 말인줄 딱 압니다. 근데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이 제대로 이어져가고 있지 못할 때는 도대체 하나님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게 돼요.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어쨌든 야곱은 그 땅이 어딘지 알았습니다. 아니 20년을 이 오더 기다렸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근데 야곱은 분명 벧엘인지 알면서도, 세겜에 와 버린 겁니다. 그러니 애초에 벧엘로 갔다면? 이런 일도 안 생겼을 겁니다. 순종해서 간 거니, 이런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가고, 다른 신앙적으로 업 되기 위한 영적인 도전 받았을 겁니다. 게다가 10년이니 얼마나 성숙해졌겠습니까?
결국 이 참담한 사건은, 벧엘로 가야 되는데, 안 갔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나님 정확하세요. 잘못된 갔으면 얼마를 갔던 돌아오게 해서 그기 앉혀놓고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자, 그럼 어차피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면 우리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그거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서 우리도 같은 경우를 만났을 때 승리를 준비하자.
 
먼저 벧엘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도대체 벧엘이란 어떤 곳입니까?
구약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지명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곳이고, 또 야곱이 20년을 삼촌 라반집에서 타향살이하는 동안에 그 마음의 고향이요, 힘듦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만든 곳이 벧엘입니다. 그 벧엘로 돌아가는 것이 야곱의 로망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노후는 한국 가서 살겠다는 분 있으시죠? 야곱에게 벧엘이 그런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죠. 9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미 10년을 세겜에서 살았어도, 벧엘로 돌아오지 않은 한, 어디서 살던 밧단아람이래요.
그럼 그동안의 10년은 어떤 세월이었냐? 잃어버린 10년입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신앙 잃어버리고, 살아온 거랍니다. 그건 소용없는 시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간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세겜에 있었더래도,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함께 해 주신 겁니다.” 안 그랬으면 이보다 더 큰 일이 뻥뻥 터졌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평안히 왔다고 했죠. 그 말은 하나님께서 목표를 잃고 세겜에 갈 때까지 또 거기서 방황하는 그 순간에도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요? 지금껏 헛사는데도 지켜주셨어. 하나님의 은혜죠. 하나님 다 만져주셔서 우리로 감당할 만한 시험만 허락해 주신 겁니다. 목표는 벧엘이야. 목표를 잃지 맙시다.
그래야 우리 이 아까운 시간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됩니다. 예수만 바라보고 갈 수 있어요.
 
또 벧엘은 어떤 곳이냐면, 우리 인생에 위기가 왔다 싶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붙잡을 수 있는 곳, 하나님을 만나서 어렵다고 하수연하고,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꼭 장소로만 한정시키지 마시고요,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 말씀이기도하고, 기도하는, 기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우리 문제 해결 받을 수 있는 곳이 벧엘 입니다.
사람이기도 해요. 목사님, 장로님... 진심으로 함께 눈물 흘려주고, 가슴 아파해 주고, 같이 뜨겁게 예수님께 기도해 줄 수 있는 분들 있죠? 그들과 같이 기도하는 그곳이 벧엘에요.
저는 어려운 일 있으면 시편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시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말씀 벧엘입니다. 기도의 벧엘입니다. 나의 목자 되신 예수님, 날 인도하소서. 찬송가는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우리의 목표인 이 벧엘을 잃지 맙시다.
 
그럼 이 목표를 다시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필요합니까?
신앙이 흔들려본 적이 있는 분들은 뭔 말 안 해도 이게 뭔 뜻인지 아시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뭐라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고 알아듣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요, 10년 살던 정든 곳이 와르르 무너지고 정신이 번쩍 드니깐 말씀이 너무 잘 들려요. 벧엘로 가라. 아~ 그거였군요. 그래서 2절에서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정신 차리고 집안을 둘러보니깐,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온갖 우상들을 다 섬기고 있고요, 그에 따라 온갖 비리는 다 저지르고 있고, 옷은 또 왜 그 모양인지...
근데 4절 보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야곱이 말할 때 빠진 것이 있죠? 귀고리에요. 여기서 ‘그들이’ 누구냐면? 하란에서 데리고 온 종들, 창32:7에선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들이라 했어. 가나안 들어와서 10년을 같이 지냈고, 하란까지 치면 적어도 20~30년을 야곱과 같이 한 사람들입니다. 같이 살다보니 자연히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해 주시는 것을 다 봤어요. 이 사람들 별로 표는 안 냈지만, 분명히 믿게 된 사람들에요.
적어도 하나님께 대한 기본을 알고 있는 거에요. 물론 딱 기본만 알아서 그렇지,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귀고리도 갖고 오지않았습니까?. 야곱이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신앙 갖고 있는 분들 있죠? 여러분들은 어때요? 다니긴 하는데, 별로 표가 안 나는 신앙인, 더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얕은데 있지도 않고, 별 탈 없이 잘 믿어요.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라면, 여기서 좀 더 합시다. 조금 더 기도하고, 섬겨봅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보태자. 하나님께 조금만 더 집중해 보십시다.
 
또 벧엘로 제대로 돌아가려면, 우리에게도 이렇게 못 보는 것들 있어요. 사각지대에 있어 안 보이는 것들. 그런 신앙적인 blind spot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위기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잘 안보이고, 그려러니 하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해왔던 것들, 그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렇죠? 모르는 거라든지, 처음 하는 것에는 긴장하잖아요?
지금 뭘 강조하고 싶은지 아시죠? 영적으로 못 보고 있는 것들을 보자는 말씀 드리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20년 전부터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하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에 나타난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니 신풍나무 가지를 양이나 소가 임신할 때 흔들어준다고 점 있는 것들이 태어나요? 그런 게 어딨어요? 은혜인데, 영적인 눈이 가려져서 그걸 못 봐.
그렇게 못보던 것들, Blind spot으로 가려진 것들을 영의 눈을 뜨고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 함께 해 주심도 보시고, 신뢰하지 못하고, 당연히 설 자리에 서지 못하고 있음도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벧엘로 제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뭔지 잘 알 수 있어.
 
말씀 맺습니다.
이거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선 야곱을 20년, 30년, 그 이상으로 쭉~ 지켜보고 계셨어요.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했으면 어느 정도 무게로 했는지 그 결단의 무게를 눈여겨 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뭔가 하기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단지 비슷하게 하는 건지, 진짜로 확실하게 하는지 보고 계시죠. 같은 blue라도 navy blue하고 baby blue하고 blue 하고 다르잖아요? 우리가 그걸 확실하게 분별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럴 때 하나님 주신 은혜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변의 다른 세겜족속들이 야곱 일행을 아무도 복수할 의도로 뒤쫓아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5절 “하나님께서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이 함께 해 주시는 은혜, 보호해 주심을 받읍시다.
그리고 9절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10년을 뺑뺑이 돌았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복 받는 일이 야곱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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