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와 촛불, 작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을 보면서 느낀 점이, 사람들이 너무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깐 자신들만의 line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 line을 넘는 사람이든 뭐가 되든 무조건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거죠. 사실 이 line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게 보통 삶이었습니까? 너무 많은 사건, 사고들을 경험했죠. 많은 실수와 오류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뒷통수를 얻어맞았고, 배신을 당했는지 셀 수 없어요. 이젠 사람들 얼굴만 봐도,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감이 딱 서. 표정 보면 뭔 말 하려고 하는지도 알아. 물론 우리들 자신도 필요할 때 많은 거짓말 해왔고, 남의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해 경계심도 생겼고, 불신도 생겼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미움과 분노도 생겼습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우리 마음에도 그런 가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지요. 사실 성도로서의 신앙 face를 갖고 있지만, 이런 상처난 가시들이 내면에 숨어서 line 만들어 어찌 보면 이런 상처와 가시 위에 우리 신앙이 세워져 있지나 않나 싶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큰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듭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이런 것들이 안 드러나다가 어느 순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나 상황을 만났을 때 ‘툭~’하고 튀어나오죠.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좌로나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만 보는 겁니다. 근데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두 개의 신앙이 있을 수 있다 이거죠. 하나님 말씀대로 가는 신앙, 좌든 우든 내 line을 지키려는 신앙. 오늘 우리는 주인공인 요나에게서 좌로나 우로 치우칠 부분이 심각하게 있는 걸 발견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욘1:2에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습니다. 그리고 7~80년 후면 그들에게 망합니다. 그런 나라가 회개하고 돌이킨다? 아니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정말 위험한 일이죠. 그들이 돌이키면 이스라엘을 살려두겠습니까? 이건 말 안해도 너무나 뻔한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도무지 따를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줄이면 순종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말씀이 우리 속에 형성된 ‘line’을 뚫고 들어오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방향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겁니다. 보세요. 요나가 단호하게 거절하잖아요? 하나님 말씀이지만, 따르면 민족이 죽잖아요? 그래서 다시스로 갔습니다. ‘다시스’란 ‘세상 끝’. 세상 끝으로 가서 숨어버리면 하나님 어쩌실 거야? 이런 요나를 보면서요, 사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편견과 자기 고집을 가지고 신앙생활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들어드릴 수 없는 line을 만들어놓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의 도전에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셨단 말입니다. 먼저 요나가 탄 배 위에 엄청난 폭풍우를 내려서 가는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그걸 요나가 알았을까요? 예. 당연히 알았죠. 요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에요. 선지자입니다. 왜 그걸 몰랐겠습니까? 알기에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잔겁니다. 그러고 볼 때, 요나는 참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보다 더한 것이라도 보내실 것이고, 이 사명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도 알아요. 그래서 잠을 잔겁니다. 문제는 하나님 믿는 신앙이 자기 생각을 이겨내지 못한 겁니다. 보세요. 일이 그 정도까지 되었으면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맞는 건데 오히려 그 반대잖아요? 요1:12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이게 신앙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죽어도 하나님 명령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나를 바다에 던지라.’ 이게 무슨 신앙적에요~ 의외로 예수를 믿지만, 그 말씀대로는 따를 수 없다는 맘 갖고 행동하시는 분들이 참 많아요. 그래도 하나님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결국 삼일 만에 요나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주님만 따르겠다고 고백을 한 것 같아 보이죠? 그 다음 행동을 보세요. 전혀 아닙니다. 고백하고 행동이 달라요. 욘3:3b-4을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며칠 동안 전했다고요? 하루 동안만. 그것도 ‘회개하라.’ 그런 말 안했어. ‘니느웨가 무너진다~’ 대충 말하고는 재빨리 성을 빠져 나온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회개하면 안 되잖아요? 그정도까지 했으면 하나님께서도 좀 알아주셔야 하는데, 짐승들까지도 금식하고 회개하게 만드셔. 그러니 요나가 불같이 화를 내는 거죠. 아니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애초부터 하나님 생각이 틀린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제가 몇 번이나 죽겠다고 했습니까? 근데도 기어이...
요나, 아무리 폭풍우를 몰아치게 해도,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굶겼어도, 그렇게 기도를 시켰어도, 박넝쿨을 통해 충분히 알아듣게 가르쳐줘도. 그 마음의 line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요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선을 딱 그어놓고 그 밑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닿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정말 우리 손해에요, 신앙이 성장을 못합니다. 중간에 막혀 버려요. 뭐하나 끝까지 못 해본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새를 해도 하다 말고, 통독성경을 해도 중간에 관두고, 신앙의 행동도 끝까지 못하고 항상 뭔가에 부딪혀서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왜 이럴까요? 어느 분이요, 어머니가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새벽기도 나와 열심히 기도했지만, 어머니는 살지 못했습니다. 새벽기도는 절대 안 합니다. 기도는 부탁하는데 신뢰하질 않아요. 마음의 line을 그어버렸습니다. 그뿐입니까? 정직하게 쉐어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나눈 말이 돌아다니면서 은근히 공박을 당해요. 그 후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놓지 못해요. 어떤 이는 학교 다닐 때 좀 놀았답니다. 친구 소개로 교회를 나갔더니, 전도사님에게 다른 아이 부모가 큰소리로 ‘저런 애를 우리 교회에 받아주면 어떻합니까? 우리는 교회 나갑니다.’ 하더래요. 그 후로 누가 교회 나간다고 하면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굴 권면을 못해. 이렇듯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하나님마저도 보이콧트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거 압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계속 기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수십 수백번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 은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그럼 남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나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저 은혜 받을 가치가 없는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만 보이게 될 겁니다. 그 하나님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잘못 갖고 있는 이 line을 하나씩 지우고 하나님만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나를 향한 잣대는 크고 정확하게 하고, 남을 향한 잣대는 아주 낮게 하는 훈련야. 마음에 있는 미움과 질투, 두려움, 이기적인 경계선을 말씀으로 메워나가는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 걸고 순교의 자리에 서는 거창한 것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을 몸으로 행하는 것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미움과 다툼을 용서로 바꾸는 방법, 욕심을 희생과 헌신으로 바꾸어 가는 법, 분노와 저주를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 그게 신앙생활, 예수 따르는 겁니다.
자, 이제 욘4:12을 읽어봅시다. 예. 4:12절은 없습니다. 요나서는 결론이 없는 책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넌 그 다음에 어떻게 할거니?’란 질문으로 끝내시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해라. 계속 마음에 line 갖고 니 맘대로 살거냐? 아니면 다 지워버리면서 살거냐~ 예수님 베드로에게 비슷한 질문 하셨죠. “니가 나를 사랑하냐?” 주께서 아시잖습니까? 당연히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도요, 예수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면서 따라 갑시다. 베드로처럼.
20-0119 은혜 받은 사람들 사49:1-5
몇 번 말씀 드렸듯이 성경은 1500여년에 걸쳐 쓰여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쓰여진 요한계시록이 A.D.95-96년 사이에요.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부터 시작해서 2000년 전까지 쓰여 졌기에 지금하고 시대적인 격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두 가지 지평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죠. 하나는 성경이 쓰여 지던 그 시대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죠? 그때하고 지금하고 인간의 삶의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기다가 말씀 안에도 시대의 격차가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종’이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이 여호와의 종이 누구냐~ 할 때, 이 글을 쓴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약 9백년 후인 A.D. 1년에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9백년의 격차가 있지요? 그러니 여호와의 종을 이사야서의 이사야 선지자라고 할 때 주시는 말씀의 의미와 9백년 후에 오실 메시야라고 할 때의 말씀의 의미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아주 당연하겠지요?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이사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사야를 부르시듯 또한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 말씀을 통해서 들어 보자 이겁니다.
먼저 우리도 여호와의 종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먼저, 종이 가져야 하는 절대적인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❶ 절대 순종 ❷ 절대 신뢰 ❸ 절대 의존입니다. 예를 드리자면, 우리는 공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합니다. 이거 들이켜도 잘못되지 않는다. 그걸 절대적으로 믿죠? 공기 못 믿어요? 그럼 숨 멈춰 봐요. 어찌되나? 그냥 죽어. 공기가 꼭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종도 주인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종, 신뢰, 의존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에요. 주의 종으로서 이 공기 주신 하나님께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를 갖고 순종하고 의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갑으로서 을을 대하는 것처럼, 그냥 하나님 기분 내키는 대로 막 하시냐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화가들이 그림 그릴 때 주변 배경이래도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그린다고 하죠. 이것부터 아십시오. 우리 정말 기분에 따라 있고 없고, 되고 안되고 절대 그런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참새 한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에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영원히 짝~ 달라붙어 있을 사람들에요. 주님 입장에선 영생을 허락하신 사람들에요. 영원히 주님 메이트에요. 우리가 그렇게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옆에 아내나 남편 보세요. 한번 지긋한 눈으로 보세요. 손도 한번 잡아보고... 그냥 한 번 보고 맘에 들어서 하루밤 사이에 결혼했어요? 아니죠? 신중에 신중을 기했죠? 하나님께서는 더한 신중을 기하셨어요. 영원히 데리고 다니셔야 하니깐. 1절b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엡1:4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했습니다. 어머니 복중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으니 이건 정말 엄청난 겁니다. 옆에 분 보시고,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기다가 2절a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회사에서 사람들을 구할 때에는 일할 파트에 따라서 구하지 아무렇게 안 구해. 어카운팅이냐 QC 파트냐 상품 운반할 트럭 기사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당연히 우리의 달란트에 따라서 부르십니다. 적당히 부르신 것 아니에요. 하나님 다윗을 처음부터 다음 왕으로서 부르시고 기름을 부우셨습니다. 철저하게 왕으로서 꼭 필요한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결정을 내릴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사울이 왜 끝까지 왕이 못되었어요? 그 훈련에서 낙제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을 다 죽이라고 했으니 진멸하면 되는데, 그럼 자기도 살고, 이스라엘도 사는데 눈앞에 보이는 소떼를 보고 흔들린 겁니다. 물론 다윗도 실수 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하루에 7만명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왕으로서의 책임 큰 줄 알고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지 모릅니다. 왕으로서 특화된 훈련을 시키신 겁니다. 본문에서는 그걸 ‘날카로운 칼이 되도록 갈으셨다.’고 한 겁니다. 어떤 때는 준비될 때까지 숨기셨습니다. 튀어나온 돌이 먼저 정에 맞는다 했죠. 2절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하나님의 보호 중에 숨기심이고,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원하시는 때에 적절히 쓰임 받을 때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수아를 보세요,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이끌었으니 모세의 뒤를 이을 때까지 40년을 기다린 겁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십니까? 모세 뒤에 숨어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담대함을 배운 겁니다. 배운 것이 있으니 역사의 전면에 나섰을 때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강력하게 앞으로 나간 겁니다. 40년 동안 숨기시고, 붙드시고, 힘을 더해 주시고... 그런 과정을 통해 칼 같이 쳐서 쪼개는 능력, 화살같이 두터운 갑옷이라도 한 방에 꿰뚫어버릴 능력을 길러주셨습니다. 이제 외쳐라~ 태양에 중천에 머무르라~ 나와 내 가족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으니 너희는 이제 결정하라~ 이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여호수아만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껏 이 훈련을 알게 모르게 다~ 받아 왔습니다. 그럼 이 능력 받는 종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리야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가 엘리야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합왕에게 3년 동안 비 오지 않는다고 전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딱 전하고 나니깐, 하나님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릿시냇가로 보내셨다가 그기서 물이 떨어지니깐 사르밧과부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설마 자기 고향에 숨어 지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리고는 드디어 갈멜산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하늘로서 불이 내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무릎 사이에다 고개를 넣고 기도하니깐, 가뭄을 한 방에 해결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엘리야로 기도하는 훈련을 시키셨으면 무릎사이에 고개를 넣고 기도하겠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순간에요. 근데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3절과 4절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있죠? 느끼셨습니까? 이세벨의 한 마디가 엘리야를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셨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자기 살 곳을 찾아서 숨어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우리에게 가장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베드로처럼요, 예수님 안 쳐다보고 파도치는 바다를 쳐다볼 때입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날카로운 칼로 우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밀어지고 있다고 보일 때가 가장 큰 신앙의 위기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주님을 쳐다보지 않으니깐. 그냥 피하고, 안전하다 싶은 곳만 찾아서 들어가서, 웅크리게 되고... 복지부동이라 하죠. ‘배를 땅에 딱 깔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예전에 공무원을 풍자해서 쓰던 유행어였죠. 너무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겁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다 안 되더라. 그러니 기도를 해도 건성으로 해요. 열정적으로 뜨겁게 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죠. 매사에 초점이 없어요. 흥미로울 것도 없어요. 열심을 내서 이리뛰고 저리뛰어도 안될 판인데.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나님이 지금 내가 이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잘 알고 있으시겠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이러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나무가 어떻게 된 지 궁금하시죠? 한 일주일 날이 좋길래 바깥에 내다놨더니 이래 됐어. 저는 여기서 이런 것을 꿈꾸고 기대합니다. 주님도 꿈꾸길 바래. 그러니 우리가 우리가 좀 웁시다. 소경 바디매오, 열명의 문둥병환자들 공통점이 뭡니까? 예수께 울었습니다. 우리가 좀 나섭시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 열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 주님이시면 하신다~ 우리가 좀 기대를 가져 봅시다. 백부장, 헤롯왕의 신하. 당장 눈 앞에서 내 종이, 아들이 살아나진 못했어도, 예수님께서 ‘나았다’고 하셨으니 그 말을 믿고, 기대를 가지고 집으로 갔듯이 우리가 좀 기대를 갖고 집으로, 가 봅시다. 그럼 도착하기도 전에 응답 주실 줄 믿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충분히 해볼 건덕지가 있는 것이, 지금까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크고 작게,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놀랄 만한 일들을 보여주셨잖아요? 무엇보다 주님 말씀대로 임마누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주님 우리와 함께 해 주셨어요. 선지자가 외치잖아요? 5절 말씀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할. 주님 우리 여전히 능력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숨기시고 딱 알맞도록 훈련시켜주시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더 울고, 기대해봅시다. 렘33:3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니 믿어보십시다. 우린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일을 우리에게 앞으로 이루어주실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할.
20-0112 예배하는 사람들 요4:13-24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는 몇 가지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끝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 하나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돼.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이게 종잡을 수가 없어요. 셋째는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거죠 문제의 원인도 모르니, 대책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이 없어. 딜레마죠.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그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 ‘이 산’은 그리심산입니다. 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하였냐면, B.C 922년에, 르호보암왕 때에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남쪽의 유다, 북쪽의 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에게 딱 한 가지가 문제가 있어요. 예루살렘성전이 북이스라엘에 없는 겁니다. 근데 북이스라엘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절기만 되면 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성으로 가는데 그게 걱정에요. 게다가 예배드리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주정헌금 등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이건 북이스라엘의 돈이 남유다로 흘러가는 것이고, 게다가 백성들의 마음까지 남유다로 쏠려버리면 어떻하냐그것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차단하고, 남쪽 국경 근처의 벧엘과 북쪽 끝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금송아지가 뭡니까? 광야에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낸 하나님이다.’ 하면서 만든 우상 아닙니까? 그거 만들어놓고, 이제는 예루살렘까지 갈 것 없다. 제사장도 레위지파 꼭 필요하지 않다. 누구든 원하면 제사장 해라. 기회를 줄게. 한 마디로 예배라는 정말 소중하고 고귀한 것을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고, 이상한 사이비종교 하나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걸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라 한 겁니다.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 결혼하는 혼합정책을 사용하는 바람에, 혈통, 종교, 문화적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순수성이 훼손되어 버리고 사마리아사람이 되어서도, 그 잘못된 제사는 그대로 존속됩니다. 페르시아 때에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따로 지었습니다. 그러다 B.C. 128년에 하스몬왕가의 히르카누스가 파괴해 버렸는데도, 그 잔해에서 사마리아인들이 계속 제사한 겁니다. 근데 그 제사가 어떤 제사라고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금송아지에게 우상숭배한 겁니다.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장애는 얼마나 많은지... 그거 왜 나한테만 자꾸 방해가 올까~ 그래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예배 못 드리도록 예배하려는 자를 삼키려고 불같이 덤벼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거 알고 목숨 걸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 최선을 다한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자를 기뻐하십니다. 할. 교회를 못 나오시는 분들 심방을 가보면 두 가지 반응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교회를 다녔다는 모양은 있으되 예수 능력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예배를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심령을 갖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감격.. 여러분, 우리 가운데 무엇보다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살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배에 눈을 떠야 합니다. 죽은 예배를 드리면서 뭐가 좀 잘 되기 원한다(?) 기대하는 거야 뭐 공짜 아닙니까? 기도 한 줄 안하면서 응답은 왕창 받으려고 하고... 일은 안 하면서 결과는 엄청 기대하고... 반대로 참 예배에 실패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준비를 엄청나게 하고 예배를 드리려 왔는데, 모처럼 만에 교회에 왔는데, 졸다가 끝났어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주 허탈한 거에요. 이런 일 발생하지 않도록 정말 깨어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의 부재는 도덕성을, 신실성을, 정직성을 망가뜨립니다. 이 여인의 문제 원인도... 이 여인이 왜 대낮에 우물가로 왔을까요? 보통은 해질녘에 날이 선선해 졌을 때,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오는데, 유독 이 여인은 정오에 나왔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가끔 그런 모습 볼 수 있죠? 예수 잘 믿는데, 사람들한테 욕먹고 있어. 문제가 있는 거에요. 사실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고 동거남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여인이 남의 남편을 빼앗서 결혼했고, 지금 있는 자도 남의 남편이었던 자다.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다섯명의 남편과 사별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걸 근거로 당시 사회가 지금처럼 밥 먹듯이 이혼하는 시대도 아니고,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였기에 남녀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시기였기에 사별했을 거라 합니다. 그러니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이 여인 마음이 어땠을까요? 지극 정성이었을거고, 안죽이려 애썼을 겁니다. 물론 이 남자와도 불륜입니다. 그래도 외로우니깐 누가 뭐라든 일을 저지른 겁니다. 그래놓고서는 주변 사람의 눈총이 너무 따갑고, 싫으니깐, 아무도 없을 때 온 겁니다. 불쌍하긴 하죠. 그래도 우리가 봐야하는 건, 그 이여인의 불쌍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삶에 하나님 경외가 없어지니깐, 도덕성이 망가진 것 보세요. 그러니 그 다음에 오는 문제는 말씀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입장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는데, 앞부분만 들리고 뒷부분은 안 들렸어요. 듣고 싶은 것만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겁니다.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히 여기시고 온전하다 하시는 것을 분별하기에 힘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 중심대로 하려고 하는 때가 있죠. 그럴 경우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 말씀이 전체로 들리지 않고, 나에게 맞는 말씀만 들으려 하죠. 그러니 믿어도 자기 방식대로 믿어요. 사실 좀 위험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응답 받는다고, 성경을 통독으로 정독으로 읽지 않고, 또뽑기 식으로 읽어요. ‘주실 줄 믿습니다.’ 해놓고 가운데를 딱 뽑으니, 사울이 칼에 엎드려 죽었더라. 오 마이 굿니스, 하나님 이건 아니죠. 그래서 좀 뒤로 딱 폈더니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유다가 자살해서 죽으매...’ 이건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다른 좋은 말씀 주세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이러면 우리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게 오늘 이 여인의 아픔이고, 눈물이고 우리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너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예배가 없어. 예배가 없으니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만남이 없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기쁨, 진짜 평안 그게 뭔지를 몰라. 그러니 뺏고 뺏기고, 숨어다니고, 그래 사는 거야. 그러나 나는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주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한 해 동안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까? 성령님께 무엇을 도와달라 해야할까요? 이 한 해 동안 사랑하시는 여러분, 무엇보다 예배를 살립시다. 이 살아있는 예배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기쁨, 평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은혜를 우리가 받읍시다. 영의 눈이 번쩍 뜨게 되십시다. 주님의 뜻을 귀하게 분별한 신앙생활로 이어지게 하십시다.
20-0105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37:1-14
본문의 뼈 환상은 이스라엘의 당시 형편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3차례에 걸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왕족과 귀족 관원 기술자 할 것 없이 모조리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망한 겁니다. 그 모습이 뼈 바다입니다.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었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그 뼈를 허탈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건 상식적으로 볼 때 정말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산소 호흡기를 꼽고 있는 사람을 보며 이 사람이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묻던지, 말기 암으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을 가르켜서 살 수 있겠냐 묻는다면, 생명이 아직 붙어있으니깐, ‘가능합니다.’라든지 ‘씨게 기도 한번 해 봅시다.’ 하겠는데, 뼈조차 말라서 누렇게 되어 있잖아요?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물어보시면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칼빈은 ‘신앙이란 눈을 감고 귀만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했고, 무디는 ‘신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20년 첫 주일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하신 질문에 대해 가장 신앙적인 답을 우리 함께 찾아보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뼈골짜기가, 왜 생겨났을까~ 라고 할 때, 아마도 이곳이 바벨론과 유다간에 있었던 큰 전쟁터고, 여기서 유다군이 몰살당하면서 그 시체를 방치해 둔 바람에 생겨났겠죠. 물론 이건 환상으로 본 겁니다. 그 뼈무더기 속을 지나가게 하셔서 “본즉.” 아주 자세히 보니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정말 자세히도 본 겁니다. 뼈가 말라서 노랗게 된 걸 본 걸 겁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내용이 창2장에 나옵니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지나가는 암수 동물들을 보면서 아담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하라고 이 일을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무슨 생각을 하게 하시려고 이를 보게 하셨을까요?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뭔 생각하고 있냐를 3절에서 물으신 겁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그거 니 눈으로 내 생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현실을 제대로 아주 자세히 들여다 봐~ 그러니깐 뭐가 보여~ 어떤 생각이 드니? 예.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만을 보는 훈련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우리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우선으로 여기고 최고인줄 알아요. 이게 굳어지면 다른 면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선 너무 관대해. 딴 사람이 실수하면 정확히 꼬집어 내는데, 자기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뭐 그럴 수도 있지~’ excuse가 너무 잘 돼. 그러면서 자기를 늘 높게 여기고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단 말에요. 그러니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이를 두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3:17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만하면 잘 하고 있는 거야~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자기 생각에 취해 있는 거에요. 그게 착각이라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해요. 그러니 내 중심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정신 차리고 봐~ 보는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고자 하시는 지 그걸 봐~ 선지자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했죠. 이게 참 정답이더라고요. Yes, No가 아니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 대답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거 당연히 안 되는 것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뼈가 다 누렇게 되었는데... 결국 저는 부정적인 답을 생각한거죠. 그러나 주님 말씀은 ‘봐봐~ 좀 더 자세히 봐봐~’ 그래 바짝 말라 있는 뼈를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깐 뭔가 달리 보이는 거에요. 오늘 하나님 우리에게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을 하나님 눈으로 보라 하십니다 뭐가 보이십니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어떻게든 깨어 기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고요, 못 나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요, 어느 분은 새벽 오셔서 알레지성 기침을 하는데, 그때부터 저 다른 기도 안 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 기도만 했어요. 어느 분은 제가 아무리 봐도 웃을 일 없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기쁘신지... 19년에서 20년으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서 제 main 찬송이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보이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도 보이고, 기도하려고, 일어서려고, 주님 앞에 있으려고 안간 힘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봐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이제 들어야 합니다. 4절에서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심령, 우리 생활, 자녀들, 가게와 직장들이 올 해는 또 어찌 될런지 암담합니까? 뭐가 복잡합니까? 주님 앞에 다 갖고 나오세요.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방법을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십시오. 믿고 맡겨서 우리 마음 좀 편해져 보십시다. 할. 이 나무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참고로 원래 이랬습니다. 당뇨에 좋고, 고혈압, 피 맑게 해주는 일명 ‘바나나나무’에요. 근데 이게 열대수라 겨울이 되어서 집안에 들여놨더니 그 무성한 잎사귀가 다 말라 비틀어져 버려서 지금 숨만 깔딱 깔딱 쉬고 있어요. 살겠어요? 죽겠어요? 예. 살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다 마르고 비틀어졌어도 가지 끝 조그만 잎새들 보이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지금 최소한 활동만 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봄이 되면 밖에 내놓을 겁니다. 그럼 봄기운이 들어갈 것이고, 새 힘이 쏟아날 것이고, 잘 자라날 환경이 조성될 것이고, 하나씩 하나씩 새 싹을 내놓을 것이고, 이전보다 더 무성한 잎새를 자랑할 겁니다. 그러면 저는 맛나게 뜯어먹고서 제 피도 맑아질 것이고...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우리 인생에 대해 기대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저 나무의 청사진을 말씀드렸잖아요? 자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뻔한 일이고, 길이라도요, 시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내 소리 듣지 말고, 예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래야 일이 이루어지고 돌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일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이유는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생명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이 옆구리를 창으로 푹~ 쑤셔서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제 곧 다시 오십니다. 믿아. 그러니,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우리 삽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앞에 있을 다음 단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 말은 앞으로 어떻게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나타날지를 기대해봐라는 겁니다. 하나님 분명히 우리 마음 아십니다. 우리가 정말 어떻게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주일을 지키려고 얼마나 마음 졸여하고 있는지, 기도의 자리에 서려고 어떻게 힘을 다하는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그거 다 알고 계십니다. 좀 부족해서 부끄럽다고요? 그것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 ‘생기야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성령이여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신겁니다. 우리 마음도 아시고 기도 소원도 아시고, 분명 응답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듣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9% 뼈 였던 것이 다 살아나서 이제 1% 공정 생기만 들어가면 됩니다. 사람도 아닌 뼈 바다였던 것이 사람처럼 다 변화되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겨우 1% 남았어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길 우리는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게 하나님 중심 신앙과 자기중심 신앙의 분깃점입니다. 1%의 가능성, 99%는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고, 나머지 1% 정도는 하나님이 사람의 협조를 구하신다(?) 이게 신인협조론, 자력구원설이 되는 겁니다. 우끼지 않습니까? 겨우 1%만 어떻게 우리 생각대로 한 번 잘 해보겠다는데 그걸 두고 자력구원설,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니... 분명 우낄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냐 싶을 겁니다. 그래도 이건 진리입니다. 사람은 아담 이후로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우리 스스로 정화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성인들이 나와 아무리 성인처럼 해도 우리가 또 그걸 따라서 한다 해도 안 돼.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 아니고는 구원 받을 사람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야만 작은 일 하나라도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99%를 하나님 이루어주셨으면, 나머지 1%도 주님의 도움을 더 강력하게 구해야만 합니다. 그게 정석야.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아~ 하나님이시구나. 무덤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이 해 주셨구나~ 고국 땅에 돌아와서도 아~ 하나님께서 밤의 달도 낮의 해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구나~ 우리가 분명히 이 귀한 진리 알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고백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고백 듣고 싶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찌시렵니까? 이 한 해, 어떻게 사시렵니까?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 강렬한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은혜만 따라 살고, 응답 받는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축복으로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기적을 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듣게 해 주십니다. 할.
19-1222 2019년의 성탄 신앙 눅2:8-14
오늘 말씀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그림은 역시 ‘구유’입니다. 그러나 이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을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너무 불결한 주변 상황 때문에 갓 태어난 이 아기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 작고 연약한 아기는 놀라운 인생을 사셨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각자의 신앙의 결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Beloved, 구유에 누인 아기로만 보겠습니까? 당신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까?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점점 커져가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듯이, 구유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성장되는 믿음 가지시길... 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성탄이 주는 참 믿음의 진실을 찾는 성탄 신앙 가지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9절 봅시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한결 같이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한 이들의 반응이 같습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죄성을 지닌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있던 천사를 만났으니 말에요. 이거는 꼭 중죄인이 경찰을 보면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찰이 뭐라 그랬나요? 그냥 제 발이 저리는 거에요. 괜히 잘못한 것 같고, 피해야 할 것 같고... 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하나님을 직접 본다면 죄 때문에 말로 표현 못할 공포가 다가올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못 쳐다봤습니다. 그런 모세도요, 백성들 앞에서 위엄 있는 척하고, 잘난 척 했어도, 히12:21 보세요.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벌벌 떨다 왔어요. 우리 같으면요, 아마도 봉헌이고 기도고 상관없이 기절부터 했을 것입니다. 심장마비라도... 그걸 어떻게 아냐?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목자들도, 사가랴도, 마리아도 우선적으로 천사를 만났을 때 무서워했고,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난리를 쳤죠. 에스겔도 그렇고, 다니엘 같은 경우는 아예 기절했다가 며칠을 앓아 누었다 일어났어요. 단8:27a “이에 나 다니엘이 지쳐서 여러 날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기드온은 죽는 줄 알고 막 울었어요. 삿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이게 다 하나님 직접 만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쏘인 천사 보고 이런 겁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니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면 어찌되겠어요? 죄인인 우리는 그 영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천사 보내신 겁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 기쁜 소식이 곧 성탄의 소식입니다. 아이들 잘 받아먹게 후후 불어서 식혀서 준 거야. ❶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❷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기쁜 소식을 왜 천사들을 미리 보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는지 아시겠죠? 안 그러면 다 죽어요. 무서워서 쳐다보지 못해요. 이것도 지금만에요. 예수님 우리 앞에 오실 때까지 만에요. 어쨌든 천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로 평생을 주님 앞에 있도록 잠깐만 말을 전해주고, 표적도 보여주고 해서 우리 시선을 예수께 집중하도록 하는 역할 뿐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니깐, 천사가 화를 내잖아요? 자기는 절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절과 경배는 오직 어린양 예수 우리 구주께만 돌리는 거라고. 천사가 딱 그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았기에 죄인된 우리 인생이 보기에 좀 두려울 뿐입니다. 아시겠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성탄의 복음입니다. 그들이 전해준 이 성탄의 복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눅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두렵지도 떨지도 않고 그저 평생 주만 섬기게 해 주시기 위해서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할. 핵심을 들어야합니다. “구주가 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합니까? 죄 때문에 그래. 그 인류를 죄와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시고,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빠짐없이 충족시키는 복을 주셔서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그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영생토록 섬기게 하기 위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직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이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겁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히브리어로 ‘메시야’. 선택된 자란 뜻이죠. 그러니깐 오신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수행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권능과 능력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교회를 섬길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았어요.할. 그리고 주이십니다. 어머어마한 호칭입니다. 성경에 20번 정도 사용되는데, 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정식 호칭(이름)으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깐 오직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권능이 주어집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깨닫도록 받아들이도록 표적도 보여주고, 기적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니, 이 말을 듣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변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마리아나 사가랴 때처럼 천사가, 평안하라~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느낄 수 있잖아요? 그 말씀을 다 깨달은 목자들이 가지는 평안함.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도 또한 주의 평안함으로 감사함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생각해보고자 하는 성탄에 대한 믿음의 진실은, 목자들에게 있습니다. 지난 주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 유대의 유력자들은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다 침묵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목자들은 당시로선 비천한 계급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런고하니, 그들은 직업상 양떼들과 같이 지내요. 짐승들과 같이 살다보니 자연히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 밥 먹기 위해서 손 씻고, 발 씻고 할 틈이 있겠어요? 그 들판에서. 그러니 자연히 유대의 정결법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거죠. 그리고 이들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쳤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은 좀 다른 부류의 목자들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희생제물용으로 드려질 양떼들은 따로 관리를 시켰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이 목자들은 양을 키우면서 아주 조심해야할 부분이 바로 양을 흠 없이 키우는 겁니다. 자연히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이래되었던 저리 되었던 그들이 키우는 양떼의 소유가 누구의 소유이든, 어떤 용도로 쓰일 거라 하는 것 하고는 상관없이 이 목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이 보던 안 보던 간에 정직하고 성심껏 깨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은 거죠. 시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정직하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일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해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자 아네요? 다윗도 형들을 대신해서 밤새도록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럼 형들은요? 선지자 사무엘 보러 갔죠. 여기서도 하나님께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다윗을 쳐다보셨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낙심했을 수 있어요. 지금 여기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왕 될 기회는 싹~ 날라갔다.’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정직한 자의 얼굴, 최선을 다하는 자의 얼굴을 보셨죠.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날까요? 그리고 설령 나타난다고 해서 아무 목자들이 다 아멘으로 받아들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긴 한데, 고집불통이 있어요. 그래서 정직한 건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가난하지만,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도 있어요. 결국 천사들은 어떤 목자들에게 다 나타날 수 있습니다. 꼭~ 천사 만나야하는 목자 없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시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예수를 우리 인생에서 구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표적이 있을 거라는 그대로 달려가서 그 표적을 확인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안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도망도 안 가고, 끝까지 자리 지키면서 천사의 말을 다~ 들은 이 목자들요, 은혜 받은 목자들입니다. 마리아나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날 때는 ‘은혜 받은 자야~’ 라고 했지만, 이들에게는 ‘은혜’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준 것도 은혜고, 그 자리를 지킨 것도 은혜고, 가서 확인한 것도 은혜. 첫 성탄 맞이한 것도 은혜고, 모든 것이 다 은혜에요. 이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성탄의 주일을 주께 예배로 드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생의 내용들이 장애가 되어, 이리저리 가로막혀서 이 은혜를 맛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나를 위해 구주가 오셨으니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합시다. 주님, 이 은혜, 예수를 내 구주로 알아보는 은혜, 내 구주가 되신 예수를 평생을 따라가는 은혜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 은혜에서 절대 떠나지 않게 하시고, 주의 귀한 손에 꼭 붙들려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주 예수여 오늘 새빛의 온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19-1215 이 여자의 믿음 눅1:26-38
언젠가 ‘어느 감독의 죽음’이란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감독목사님이 기도하다가 하나님 음성 듣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얘기 기억나시죠? 이와 비슷한 사건이 눅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일을 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물론 그 감독과 같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 일이 있은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한 겁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깐, 38절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어요. 예루살렘에 사는 유명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갈릴리 나사렛 아주 시골 산골에 사는 이 여자가, 그것도 당시 나이라고 해봤자 불과 13살 정도인 소녀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기에 이토록 믿음이 좋은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 오늘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들여다보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 나누게 되길...
먼저 천사의 소식을 듣고 “생각하매” 했다고 했습니다. 29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랍고 흥분이 되었을 건데, 사가랴처럼 그렇게 경악하는 대신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다른 말로 ‘내게 천사를 통해 이 말씀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한 겁니다. 보통 구약을 보면, “은혜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말로 접근하는 선지자나 천사들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고자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온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쓰실 건덕지가 없거든요. 지혜, 명철, 훈련, 양육 ... 26절 보면,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사마리아와 국경지대에 있는 산골입니다. 주로 도망자들이 숨을 곳을 찾아 스며드는 산골에요. 그걸 유대인들은 다 알아. 그래 당시 유행하는 격언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입니다. 빌립이 ‘나사렛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라고 하니깐 나다나엘이 대답한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생각에도 뭐 이런 산골까지 찾아와서 쓰시겠다니 마시겠다니 하냐? 또 자기가 쓰임 받을 건덕지가 없는 이유가, 자신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하고요, 꼭 있잖아요? 우리나라 종가집에 찾아와서 ‘니가 태종 무열왕 40대 후손이야, 왕손이야 왕손.’ 하는 것처럼 ‘다윗왕의 28대 후손이야, 공주야 공주. 품위를 지켜야 해~’ 아~ 그럴 때는 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게 도대체 현재 마리아의 위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망할 대로 다 망해서, 이 산골에까지 흘러와서 근근히 살아가는 살림형편에 과거에 빛나는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사명을 맡기실 만큼의 조건들을 갖춘 것이 어디에도 있질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 받은 자”라는 둥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둥의 말이 도대체가 감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에게 대해서 여러분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경험이나 교육적 수준을 볼 때, 지금껏 신앙 생활한 수준을 봐도, 하나님 위해 일 할 수 있는 후보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전혀 없다고 보십니까? 혹자는 말합니다. 마리아가 겉으로는 그래도, ❶그 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 만한 선한 덕이 있고, ❷영원한 처녀성을 지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쓰임 받기 충분하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반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런 것 없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굳이 함께 하셔서 마리아를 사용하셨다는 말. 마리아 말마 따라 34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예. 마리아의 모든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입니다. 그게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그렇기에 37절 말씀이 정답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할. 하나님 하신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분명하게 해야 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백번 천번 만번을 생각해도 준비가 안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정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제한하지 마시고, 천사가 하는 이 말씀에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할. 그리고 궁금하잖아요? 마리아도 궁금해 하죠?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누가는 마리아와 사가랴를 은근히 비교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사가랴는 제사장으로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하다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도 같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지만, 사가랴에 비해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만, 얘기를 들은 후의 서로의 반응은 그들의 급수를 바꿔버렸습니다. 사가랴가 아마도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18절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의심한 겁니다. 그래서 좀 더 확신할 수 있을만한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불신하는 속마음이 들통 났습니다. 그래서 아들 낳을 것이지만, 20절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의심의 댓가로 벌칙을 받은 겁니다. 다른 표적 보여줄 수 없고, 애 낳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벙어리다~ 뭐 그런 말이죠. 그에 비해 마리아는 당시 12~13세로서 요셉이란 남자와 정혼한 산골 처녀였습니다. 근데도 38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 말은 마리아가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❶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철저하게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❷ 또 주님이 자기 인생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고 주께 맡기기로 한 겁니다. 물론 이 순종 때문에 겪어야할 고난, 조롱 불명예스러운 일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우선 인간적으로 이게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도 이 일이 이루어져서 임신을 했다가, 발각이 되면 남편될 요셉이 이 일에 동의를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여인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져 주겠습니까? 또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미친 여자라 할 거죠. 그래서 이건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신앙의 부분이라는거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신앙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가랴처럼 좀더 확신이 들도록,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보다는 사가랴의 예를 따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의심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겠다는 둥, 아니면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 무슨 이런 협박이 다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정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죄질이 나쁜 말투요, 생각들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믿음만은 가지고서 늘 걸으며~ 우리는 마리아의 단순한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가라고 하시는 길이 고난의 길이고, 절망할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여도 그게 하나님 말씀이면, 하나님 뜻에 겸손히 복종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새빛의 성도들, 또 이 말씀을 mp3로 들을 우리 새빛의 성도들의 장점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집입니다. 할. 참으로 힘든 이 한 해를 주님만 의지하고 나아왔죠. 그게 우리 장점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릴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히 주의 큰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할 우리는 그걸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맞으시면 아멘. 이게 우리 믿음의 장점에요. 오늘 둘째 말씀은 바로 그 기다림, 기다림을 어떻게 하냐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표적을 달라, 기적을 달라~ 하면서 조바심 있는대로 다 내다가, burn-out되어 버릴 수 있어. 독수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잡아서 쇠줄(체인)로 발을 묶어서 큰 바위에 매어두었습니다. 퍼득퍼득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하는데, 발에 단단히 묶인 체인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근데 사냥꾼의 어린 아들이 보기에 불쌍했던지 슬며시 풀어주었어요. 근데 독수리가 안 날라 갑니다. 그냥 바위 위에 앉아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burn-out입니다. 정말 무서운 겁니다. 그냥 포기하는 겁니다. 어떤 기대도 안 가져요. 더 이상 부흥을 위한 기도도 안 해요. 소망도 안 가집니다. 어떤 계획도, 시도도 하질 않아요. 그냥 이대로 가다보면 알아서 되겠지~ 혹시 이런 맘 있어요? 그게 burn-out된 모습에요. 예수님 오실 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페르시야보다 더 쎈 알렉산더제국이 나타났고, 그보다 더 쎈 로마가 나타났어요. 메시야가 와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대국이 나타났으니, 그만 메시야를 포기했습니다. 기다리는데도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잊고 살았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가 그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4절 “헤롯이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절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성경적 근거까지 대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너무 좋아서 동방박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별을 찾아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하는데, 과연 그랬습니까? 헤롯만 아이들 죽인다고 설치고 다녔어요.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기다림은 burn-out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함께 해 주실 줄로 믿는 기다림,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신 것이 없음을 믿고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저는 분명히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분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요, 감사한 것이 저녁때에 아무도 없는 교회 주차장에 와서 혼자 기도하고 가시는 분이 있대요. 지난 주간에는 또 다른 분이 새벽에 매일 나와서 기도의 메이트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세요. 아니 이렇게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37절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눈물흘리면서 주님께 요청한 것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 주실 믿고 기다리면,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은혜가 있을 줄 2019년의 성탄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여자의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
19-1208 2019년의 좋은 신앙 갈4:12-20
지난 주 우리는 율법은 구원의 문 앞까지만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인도로 문 앞에서만 서성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때가 차매” 즉 하나님의 때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으로 이끄셨고,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구원 받은 이들이 한 눈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심을 알고 부를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뜨겁게 해 주셨습니다. 믿 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게 얼마나 좋았으면, 자신이 과거 율법 아래 있으면서 가졌든 모든 베네핏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이 Good News를 들고 갈라디아로 온 겁니다. 오늘은 우리도 이 좋은 복음을 받고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좋은 신앙은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13-14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 전하러 오다가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밤빌리아지방의 해안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안질 또는 간질 병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한 부분을 볼 때, 이게 간질이 아았을까~ 왜냐면 당시엔 간질을 악마와 연결시켰거든요. 사람들이 정말 불쾌하게 생각했어요. 15절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한 걸 볼 때 안질 같기도 하고요. 뭐든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거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3-14절이 하는 말이,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거에요. 이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저렇게 아프면서도 저 정도 열심인 것을 보면, 저기에 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겠냐~ 정말 복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대단합니다. 사람들 생각하고는 너무 달라. 신기해. 어느 교회에 새 신자가 갔더니, 그날따라 장로님 부인되는 여집사님과 그 교회 권사님이 머리 끄댕이를 잡고 밥 먹다 말고 싸웠대요. 하필이면 그날따라. 새신자가 왔는데, 그 분 그 다음 주일 교회 나왔게요? 안 나왔게요? 안 나왔으면 말도 꺼내지도 않았겠죠? 왔어요. 왜 왔냐? 궁금해서. 장로 부인이 안 나올까, 권사님이 안 나올까~ 그게 너무너무 궁금해서 왔대요. 찬바람이 쌩쌩 불긴 해도, 둘 다 나왔더래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분 마음에 역사하시는데, 궁금증을 갖게 역사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들어간 거에요. 갈라디아 교회에도 분명히 이런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열정에다가,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고, 소위 은혜 받은 거죠. 이 둘이 딱 합치니깐 그들 마음속에 자기 눈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신앙의 열심히 생겨난 겁니다. 교회에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었고,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런 비전도 꿈도 없는데, 역사가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는 겁니다. 지난 주 중에 새벽기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놀랐기 보다는 감동이죠. 몇 개월 만에 어떤 분이 오셨어요.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근데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목사는 항상 걱정야. 보통 갑자기 오신 것은 무슨 급한 기도제목이 생겼을 때거든요.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새벽예배가 끝나자마자 물어봤죠. 아뇨. 그런 일 없어요. 모처럼 만에 새벽기도 나왔더니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쳐다보시는데... 좀 미안하기도 했고, 더 감사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기도하러 왔으니 성령충만을 받으라 어쨌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성령의 만지심 속에서 이게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우리가 이런 귀한 신앙, 좋은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열심 있는 신앙의 자리에 굳건하게 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겁니다. 진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세요. 하나님은 과거에 백번 천 번 잘못해도, 주께 나와 ‘예수님 죄송해요.’ 하면 다 잊어주셔.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회개했으니 니 죄가 다 희어졌는데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시는데, 문제는 우리에요. guilty feeling이 남아서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 괜찮다는데 물론 우리게 이 guilty feeling이 있는 것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겁니다. 계2:23b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행동한 게 좋지 못하니 회개기도하고도 마음이 찜찜하겠죠. 성경에도 이런 말씀 얼마나 많아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대에서도 그래요. 계20:12 보세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기록된 자기 행위대로 심판 받는다고 했죠? 정말 두려운 일입니까? 안 찜찜하겠어요?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근데 자세히 보십시오.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무슨 책이라고요? 생명책 앞의 책들은 행위의 책입니다. 그기 해당되는 사람들은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받을 겁니다. 어떤 행위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랑을 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까지 불신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행위의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책이 펴집니다. 생명책입니다. 어떻게든 생명의 자리로 옮겨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눈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담긴 책이고, 은혜의 책입니다. 이건 행위에 따라 심판이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에 따라 적용되는 책입니다. 이거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착같이 우리의 과거를 다~ 들추어내실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 찾아내시는 건 우리 장점에요.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실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걸 잘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축복의 꼬투리를 있는 대로 다 적발해 내셨습니다.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영접했다.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찾아낸 것들, 너희가 이렇게 한 것들이 다 너희에게 복이 되는 것들이다.
물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상황이, 사실은 별로 좋지 못한 때입니다. 16절 봐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으냐.” 원수가 되어 있대요. 17절b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간질 당했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갈 성도들에게서 어떤 것을 찾고 계세요? 하나님을 위한 선함,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것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들,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잘난 게 뭐가 있습니까? 맨날 불평만 쏟아내고 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나안으로 이끄셨어요. 작은 꼬투리라도 다~ 잡아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해주시면서 그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믿는 우리를 위해 그 날에 생명책이 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19-20절을 합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언성을 높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자. 해산할 때, ‘아~ 나 애기 낳아~’ 하면서 낳은 분 손들어보세요. 없어요. 악을 쓰면서 낳았지. 근데 바울이 다시 그 수고를 하려는 이유는 20절 말씀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의혹이 있다’는 말은 흔들리고 있다. 그들이 100% 다 돌아선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있는 이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하신다는 것 알죠? 바울도 하나님 마음 알아요. 그러니 18절서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나 좋은 거다. 이 좋은 신앙의 일을 다시 해보자~ 계속해보자 하면서 불물 가라지 않고 덤벼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 해 이 마음이어야 해. 이게 좋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이 주신 마음 갖고 나서 보십시다.
2019년 한 해를 보낼 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은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를 섬기는데 있어 열심을 품기 바랍니다. 기도의 열심도 내고, 찬양의 열심을 내고, 마음을 주를 향해 굳건하게 하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처음 이 땅에 초림하실 때도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은혜입니다. 세상 마지막을 다룬 요한계시록에도 ‘함께 하신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보세요.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눈물도 사망도 아픈 것도 없는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요, 좋은 신앙의 일을 열심히 사모하고 최선을 다해 주 안에 있으십시다. 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 결론으로 나누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알죠? 성경학자들은 이 기도는 원래 야베스의 어머니의 기도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기구한 운명 앞에서 의지할 이는 하나님 밖에 없어서,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그걸 아들이 듣고 같은 기도를 하고...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최고의 장점인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축복을 주신 거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뚫어지라 쳐다보고 계십니다. 축복해주실 장점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좋은 신앙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우리 이웃들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우리 불쌍히 여기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장점 정말 없습니다. 내세울 게 마땅히 없고, 보여드릴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의 장점의 꼬투리를 잡으시는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이 감사와 기쁨과 형통과 평안으로 주 안에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할.